마지막 장을 덮을 권리

‘죽음’ 그 존엄한 갈무리

by 강훈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을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주권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연명치료와 존엄사에 대한 담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죽음의 질'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특히 "생명 윤리가 없는 사람이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현실적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으니 정책 차원의 고민을 해달라"는 그의 워딩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자는 차가운 계산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생명 연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삶의 존엄한 갈무리'를 위해 어떤 사회적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직한 질문이다.


조에(Zoe)의 연장이 아닌 비오스(Bios)의 완성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생명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한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숨 쉬는 상태인 '조에(Zoe)'와, 사회적 관계와 인격적 가치가 담긴 삶의 양식인 '비오스(Bios)'다. 현대 의학의 비극은 기술의 힘으로 '비오스'가 소멸한 육체에 '조에'만을 강제로 주입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의식 없이 기계에 의지해 물리적 시간만을 늘리는 상태는, 한 인간의 '이야기(Bios)'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태로 '생존(Zoe)'만을 위해 방치하는 것에 가깝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임종기에서 연명의료 의향서를 쓴 분의 경우... 인도적 차원에서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 인간을 '호흡하는 유기체'가 아닌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는 주체'로 대우해야 한다는 철학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혹한 굴레, 남겨진 이들을 위하여

존엄사를 논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벽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고통이다. "어떻게 내 손으로 부모님의 호흡기를 떼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식들은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늦추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침대에 묶어두는 것이 때로는 가장 가혹한 사랑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연명치료 중단은 '포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품위를 지키며 떠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마지막 동행'이다. 대통령의 제안처럼 연명의료 결정을 사회적으로 권장하고 제도적 인센티브까지 고민하는 것은, 자녀들이 짊어진 그 도덕적 죄책감의 무게를 국가가 함께 나누어 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페이지가 고통과 비명이 아닌, 평온한 여백으로 기억되도록 돕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겨진 이들이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선물이다.


삶의 주권은 마침표에서 완성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웰다잉이 사실 이것(존엄한 마감)이다"라고 정의했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가치를 끝까지 존중하겠다는 선언이다. 자신의 필체로 적어온 삶의 기록을 본인의 의사로 '갈무리'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된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음의 문 앞에 서게 된다. 그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차가운 기계음과 튜브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고요와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손길이길 바란다. 대통령이 던진 화두는 우리 사회가 이제 죽음을 '실패'가 아닌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억지로 늘려진 무의미한 시간보다, 스스로 찍은 명확한 마침표가 주는 울림은 훨씬 더 크고 깊다. 그것이 2025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짜 존엄한 사회의 온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