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오염

왜 종교적 언어는 공허해지는가

by 강훈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연결된다. 특히 종교적 언어는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 영원과 신비를 가리키는 고귀한 도구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의 종교적 언어들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은혜받았다"는 말은 논리적 모순이나 책임을 회피하는 전매특허 방패가 되었고, "축복"은 세속적 성공을 포장하는 화려한 포장지가 되었다. 단어의 무게가 가벼워질수록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진실성도 함께 표류한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그는 언어가 실제적인 삶의 맥락 안에서 기능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종교적 언어가 공허해지는 이유는 그 단어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뿌리에서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건네는 "기도하겠다"는 말에 구체적인 연대와 실천이 담기지 않을 때, 그 단어는 비트겐슈타인이 경계했던 '공회전하는 기계'처럼 아무런 사건도 일으키지 못한 채 소음으로 남을 뿐이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소설 <1984>를 통해 권력이 언어를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날카롭게 경고했다. 그는 모순되는 두 신념을 동시에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중사고(Doublethink)’와, 인간의 사고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변질시킨 ‘신어(Newspeak)’의 위험성을 묘사했다. 이 현상은 종교 공동체 안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명백한 잘못을 "연약함"으로, 권위주의적 독재를 "영적 리더십"으로 바꿔 부를 때, 언어는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은폐하는 흉기가 된다. 단어의 본래 의미를 무시하고 집단의 이익에 맞게 재정의하는 행위는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장 정적(靜的)인 폭력이다.


상투적인 종교 언어의 남발은 '인지적 게으름'의 증거다. 복잡한 삶의 딜레마와 고통스러운 성찰의 과정을 거치는 대신, 익숙한 종교적 문구로 상황을 성급히 결론지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한 문장은 우리에게 더 깊이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의무를 면제해 주는 마취제 역할을 한다. 정직한 질문과 치열한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박제된 문장들만 떠돌게 된다.

성경 속 예수님은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경계했다. 그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태복음 5:37)"고 가르쳤다. 이는 화려한 수사나 종교적 맹세로 자신의 진실성을 보충하려 하지 말고, 일상의 언어 그 자체로 정직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사용한 언어는 당시의 거창한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들풀, 공중의 새, 누룩, 겨자씨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언어였다. 그는 언어를 통해 신비를 감춘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숨은 신비를 드러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종교적 언어의 화려함'이 아니라 '일상 언어의 정직함'이다. "은혜"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고도 누군가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태도가 더 신앙적이다. 오염된 언어를 정화하는 유일한 길은 그 단어에 합당한 '삶의 무게'를 담아내는 것뿐이다.

신앙은 거창한 종교적 술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술어들 뒤에 숨은 나의 가식과 위선을 걷어내는 과정이다. 이제 공허한 "아멘" 대신, 삶의 현장에서 정직한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상식의 토대 위에서 정직하게 길어 올린 언어만이, 차갑게 식어버린 세상에 온기를 전하는 살아있는 신앙의 도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