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기는 영웅적 망상

불멸이라는 우상에 대하여

by 강훈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물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이 거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인간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느끼게 해 줄 상징적인 체계를 구축하는데, 문화인류학자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이를 ‘불멸 프로젝트(Immortality Project)’라 불렀다. 우리가 거대한 건물을 짓고, 이름을 남기려 애쓰며,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나를 대신해 영원히 존재해 줄 것이라는 ‘영웅적 망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현대의 종교는 이 망상을 교정하기보다, 오히려 ‘영적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부추기는 데 앞장서곤 한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이 죽음과 허무를 직면하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흔한 전략을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 기분 전환/오락)’이라 명명했다. 우리는 고요히 방에 앉아 자신의 운명을 응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몰두한다. 그것이 세속적인 오락이든, 혹은 ‘거룩한 사역’이든 상관없다. 쉼 없는 집회, 끊임없는 봉사, 거대한 성전 건축은 때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차가운 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종교적인 디베르티스망일 때가 많다. 분주함은 영성의 증거가 아니라, 유한성을 잊으려는 영혼의 비명이다.


죽음의 공포가 억압될수록 인간은 ‘자기 확장’에 집착한다. 내가 소속된 집단이 세상에서 가장 옳아야 하고, 내가 믿는 신념이 무조건 승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의 소멸이 헛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 세력이 정치적 승리나 교세 확장에 광적으로 몰두하는 기저에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보상 심리가 깔려 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은 더 큰 힘을 갖는 것이라 믿는 순간, 신앙은 ‘자아의 불멸’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신학적으로 진정한 죽음의 수용은 ‘성토요일(Holy Saturday)’의 영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십자가의 죽음(금요일)과 부활(일요일) 사이에는 하나님의 부재와 죽음의 정적이 지배하는 ‘토요일’이 존재한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부활의 승리를 외치며 죽음의 무거움을 휘발시키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정직하게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값싼 승리주의일 뿐이다.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나의 무력함과 소멸 가능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제자리를 찾게 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영웅’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한낱 ‘먼지’에 불과함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불멸을 꿈꾸며 쌓아 올린 모든 종교적 업적이 결국 무너질 성채임을 깨닫는 것이 상식적인 신앙의 출발점이다. 죽음을 직시하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짓밟거나 거창한 서사에 매몰되지 않는다. 대신, 언젠가 사라질 이 짧은 생 속에서 오늘 만난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고, 이름 없는 들꽃의 아름다움에 발을 멈추는 ‘존재의 신비’에 집중한다.


신앙은 죽음을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정직하게 패배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불멸이라는 우상을 깨뜨리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껴안을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죽음도 앗아갈 수 없는 생명의 밀도를 경험한다. 영원함은 미래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나의 작음을 인정하고 크신 하나님 속에 나를 내어 맡기는 ‘지금 이 순간’의 순종 안에 깃들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서 모든 수식어를 떼어낸 ‘민낯의 나’로 서는 것, 그것이 가장 불편하지만 가장 거룩한 신앙의 민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