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함정과 '성공'이라는 마취제
현대 한국 교회의 위기는 '메시지의 부재'가 아니라 '맥락의 부재'에서 온다. 많은 목회자가 평생을 신학교와 교회라는 거대한 유리 온실 속에서 보낸다. 특히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세상과 소통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채, 자신들만의 언어와 논리에 갇히기 쉽다. 물론 스스로는 세상과의 소통에 대해서 열려 있거나 심지어 누구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학 서적으로 세상을 배우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로 여론을 읽는 이들에게, 유리 온실 너머의 거친 들판은 그저 '정복해야 할 선교지'일 뿐 '함께 호흡해야 할 삶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심리학과 통계학에서 말하는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은 이들의 시야를 가리는 치명적인 마취제다. 주일마다 수백, 수천 명의 교인이 모이고 재정이 안정적인 중대형 교회의 강단에서 볼 때, 기독교의 쇠락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자신의 눈앞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라는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아무 문제 없다"는 안일함에 빠진다. 작은 교회로 상징되는 성공하지 못한 교회는 건강하지 않은 교회이거나 그곳의 목사가 부족한 탓이다. 이는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1등석에서 음악 소리에 취해 거대한 빙산이 앞에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들에게 성공은 성찰을 방해하는 가장 거대한 장애물이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이해란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이라고 말했다. 텍스트(성경)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해석자의 지평과 텍스트의 지평이 만나야 한다. 하지만 목회자의 지평이 오직 종교적 영역과 성공의 경험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그들의 해석은 공허한 독백에 그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의 고단한 직장 생활, 자본주의의 비정한 생리, 복잡한 사회적 역학 관계를 '경험'이 아닌 '문자'로만 배운 이들이 던지는 위로는 대중에게 진리가 아닌 '강요'로 다가온다.
목회자 특유의 직업적 왜곡으로 인한 시선은 모든 삶의 문제를 '죄', '기도 부족', '믿음'으로 단순화하게 만든다. 성경 외의 인문학적 서적이나 일반 대중 매체를 멀리하는 폐쇄성은 이러한 왜곡을 심화시킨다. 자신의 교회가 별문제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폐쇄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내 방식이 성공했으니,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옳다"는 확신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결여시키고, 결국 교회를 사회적 고립의 섬으로 만든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비종교적 기독교'를 주창하며, 신앙인이란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신학을 논하기보다, 거리에서 그들의 '삶의 문법'을 익혔다. 성육신(Incarnation)은 곧 '세상 속으로의 뛰어듦'이다. 내 교회의 평안함 뒤에 숨어 기독교 전체의 몰락을 외면하는 것은 성육신의 정신에 위배된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며 만족하는 성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목회적 실력은 신학적 지식의 양이나 교회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공감의 너비'에서 나온다. 목회자는 우물 밖으로 나와 광야의 먼지를 뒤집어쓰는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만큼이나 신문을 읽고, 비신자의 고뇌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세상' 전체를 아파해야 한다. 신앙이 고립을 성공으로 착각할 때 그것은 종교라는 이름의 괴물이 되지만, 신앙이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 때 비로소 그것은 세상을 살리는 생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