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내어주는 용기

'전도'라는 목적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

by 강훈

기독교인의 친절은 가끔 오해를 산다. 그 다정함 뒤에 '교회 한번 와보라'는 권유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행위가 결국 '개종'이나 '교세 확장'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그 친절은 순수한 환대가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 마케팅이 된다. 상대방을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이 아니라 내가 달성해야 할 '목표물(Target)'로 대하는 순간, 관계의 진실함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폭력이 시작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진정한 환대를 '조건 없는 환대'라고 불렀다. 그는 주인이 손님의 이름이나 국적, 심지어 그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묻지 않고 문을 열어주는 것이 환대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데리다는 주인(Host)과 적대감(Hostility)의 어원이 같다는 점을 지적하며, 타인을 내 영역에 들일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윤리라고 보았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목적이 있는 친절은 관계의 '상호성(Reciprocity)'을 왜곡한다.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당신은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은 상대에게 부채감을 지운다. 반면, 아무런 대가 없이 '곁'을 내어주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정서적 안전함을 준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요구 사항 없이 그저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지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교리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온전히 수용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 '자리 내어줌'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돕고 나서 "나중에 내가 믿는 종교로 개종하라"는 조건을 걸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비용, 그리고 마음의 자리를 그저 내어주었을 뿐이다. 예수가 던진 질문은 "누가 이 사람의 전도 대상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였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그가 처한 고통의 현장에 나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상식적인 신앙인은 '전도지'를 건네기 전에 먼저 '빈자리'를 만든다. 나의 바쁜 일정을 쪼개어 누군가의 하소연을 들을 자리를 만들고, 나의 편견을 잠시 접어두고 낯선 이의 생각을 담을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일상의 사제들이 행하는 거룩한 예식이다. 목적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그 만남의 틈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사랑은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빚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내 안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일상에는 누군가를 위한 빈자리가 있는가? 그 자리가 '개종'이라는 목적 없이도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셈이다. 곁을 내어주는 그 사소하고도 위대한 용기가 혐오로 가득 찬 세상을 조금씩 녹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