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이라는 자연과 실존의 거리
우리는 인생이 노력에 비례하여 보상받는 ‘공정한 경기’라고 교육받아 왔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 부유한 집안의 경제적 뒷받침, 전문가 부모의 인적 네트워크, 권력가 자녀의 정보력은 단순히 ‘운’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압도적인 경쟁 우위가 된다. 이 격차를 두고 누군가는 시스템의 야만성을 공격하고, 누군가는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생리라며 고개를 돌린다.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가혹한 신화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 불평등을 ‘능력’의 차이로 둔갑시키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함정이다.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지적했듯, 성공한 자들이 자신의 성공을 오직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믿는 순간, 그들은 상속된 행운을 망각하고 패배한 이들을 향한 오만함을 드러낸다. 반대로 출발선에서 뒤처진 이들은 자신의 뒤처짐을 ‘무능함’으로 내면화하며 자책의 수렁에 빠진다.
상속된 자산이나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유산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의 측면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더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본능을 법으로 완전히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유산이 공적 영역의 기회를 독점하거나,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기회를 박탈하는 시스템으로 고착될 때, 그것은 명백한 구조적 폭력이 된다.
분노와 박탈감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건강한 시민의 반응이다. 정의롭지 못한 시스템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평평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 분노의 뿌리가 ‘왜 저 사람만 누리고 나는 누리지 못하는가’라는 상대적 박탈감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나의 영혼을 갉아먹는 독이 된다.
인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모든 변수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출발선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지형을 알아야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어떤 도구가 필요한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트랙을 쳐다보며 뛰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속도를 낼 수 없다. 그는 승리해도 허무하고, 패배하면 파멸한다.
맺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경기가 오직 단 하나의 결승점을 향한 100m 달리기여야만 하는가? 세상이 정해놓은 그 좁은 트랙 위에서 남들과 비교하며 내 삶의 가치를 매기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으로 주권적인 인간은 타인의 출발선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출발선을 저주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달리는 트랙 옆에 자신만의 숲길을 내는 사람이다. 출발선은 내가 정할 수 없었지만, 나의 달리기 뒤에 남겨질 궤적만큼은 오직 나의 의지로 그려낼 수 있다. 불공정한 시스템에 저항하되, 그 싸움이 내 삶의 고유한 아름다움까지 훼손하게 두지 마라.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나만의 스텝으로 춤을 추는 것, 그것이 출발선이 다른 비합리적인 시대를 건너는 가장 품격 있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