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흘리지 못한 눈물

by 강훈

오늘 낮에 장례식이 있어서 다녀왔다. 미국에 온 이후로 네 번째 장례식 참석이다. 미국에서의 장례식은 죽음을 배웅하는 자리인 동시에, 남겨진 자들이 고인의 생애를 복원하는 서사의 공간이다.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가 이곳에 있다. 바로 가족과 지인이 단상에 올라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는 ‘리멤버링(Remembering)’ 순서다. 그 시간이 되면 장례식장은 거대한 공감의 장으로 변한다. 오늘 역시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풍경도 그랬다. 고인의 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와의 소소한 추억을 읊조리기 시작하자, 객석 여기저기서 낮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서사 위에 자신의 아버지를 덧칠하며 저마다의 그리움을 눈물로 환전하고 있었다.


-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진 폭력성

장례식장을 가득 채운 통곡 소리 사이에서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사람들은 딸의 눈물에 공감하며 각자의 ‘이상적인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는 따뜻한 회고의 대상이 아닌, 피하고 싶은 거대한 흉터였다. 여덟 살의 나를 두고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다정한 부성애가 아니라, 열 번의 새어머니가 바뀌는 동안 반복된 폭력과 외도였다.

누군가에게 아버지는 삶의 이정표였겠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내 유년의 영토를 유린한 가해자이자, 지독한 상처의 근원이었다. 사회가 규정한 ‘부성’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장례식이라는 집단적 의례를 통해 강요될 때, 나처럼 그 보편성에서 소외된 이들은 공감의 부재라는 서글픈 소외감을 맛본다. 다들 울고 있는데 나만은 건조한 눈으로 그 풍경을 바라봐야 하는 현실은, 나의 상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잔인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 공감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씁쓸함

내가 느낀 씁쓸함은 고인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한 슬픔’조차 허락받지 못한 나의 뒤틀린 과거에 대한 서글픔이었다. 남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흘리는 눈물은 사실 그들이 가진 ‘건강한 관계’의 증거다. 공감은 비슷한 경험의 궤적을 가진 이들끼리 주고받는 정서적 연대인데, 나에게는 그 궤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상처가 너무 깊으면 공감의 회로조차 마비된다. 그 딸의 슬픔이 진짜였음에도 마치 가짜처럼 내겐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가진 그 ‘슬퍼할 수 있는 자격’이 부러웠을 뿐이다. 장례식장의 객석에 앉아 흐느끼는 이들을 보며 내가 마주한 것은, 죽은 고인이 아니라 그 시절 폭력과 방임 속에 홀로 던져졌던 여덟 살의 나였다. 나의 눈물샘은 타인의 슬픔에 반응하기보다, 차갑게 식어버린 나의 유년을 보듬느라 이미 소진되어 있었다.


- 슬픔의 의무에서 벗어날 권리

우리는 흔히 장례식장에서는 함께 울어야 한다고, 특히 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져야 한다고 당연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모든 죽음이 애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모든 아버지가 그리움의 이름으로 기억될 수도 없다. 공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나의 인성이 메말랐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견뎌온 삶의 균열이 그만큼 깊었음을 증명하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어 집단적 서사에 합류하기보다, 공감하지 못하는 나의 씁쓸함을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했다. 타인의 추억에 올라타지 못한 채 홀로 남겨진 이 감정이 비록 서글플지라도, 이것이 나의 현실이고 진실이다. 당신의 장례식장에선 어떤 눈물이 흐를 것인가. 혹은, 당신은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기꺼이 울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약 당신이 오늘 나처럼 메마른 눈으로 객석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당신의 삶이 남들보다 조금 더 고단한 사투를 벌여왔다는 흔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