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는 법
상처는 혈액형처럼 대물림된다. 부모로부터 눈동자의 색깔이나 체형 같은 생물학적 DNA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과 분노를 표출하는 습관, 그리고 관계를 맺는 특유의 불안함까지도 고스란히 유전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세대 간 트라우마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 of Trauma)’라고 부른다. 내가 부모에게 받았던 그 날카로운 칼날을 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다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나의 자녀에게 다시 휘두르게 되는 이 비극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 여덟 살 소년이 마주한 광야와 할머니의 기도
나는 여덟 살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던 상실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대한 구멍이었다. 세상은 순식간에 홀로 버려진 광야가 되었고, 나는 그 황량한 벌판에서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다.
그 구멍을 메워준 것은 할머니의 기도였다. 권사님이셨던 할머니는 기도로 삶의 풍랑을 견뎌낸 분이었고, 그 기도의 온기는 어머니의 부재라는 시린 겨울을 지나는 나에게 유일한 땔감이 되어주었다. 할머니의 기도는 내가 상처의 심연으로 아주 가라앉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준 최후의 지지대였다.
- 혐오하던 대상을 닮아가는 비극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재연하려는 경향을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토록 혐오했던 부모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서 되풀이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나에게 가장 ‘익숙한’ 관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족치료의 거장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은 이를 ‘다세대 전수 과정’이라 명명했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과제는 다음 세대로 투사되며, 자녀는 그 불안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만약 내가 그 여덟 살의 상처를 그대로 둔 채 아버지가 되었다면, 나는 내 결핍을 두 딸에게 투사하거나,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과도한 거리를 두는 식으로 또 다른 변종 트라우마를 생산했을지도 모른다.
- 사슬을 끊어내는 자아 분화의 결단
나라고 그런 모습이 없을까? 아니 너무나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간혹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에서 그런 모습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 소름 끼치며 놀란다. 누구에게나 그 영역은 존재한다. 다만 어떻게 다루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상처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직면하고 타자화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나는 긴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와 다시 만나 화해했다. 그 과정은 단순히 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행위를 넘어, 내 안에 깊게 뿌리 박힌 상처의 지도를 파기하는 의지적 결단이었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두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지금, 나는 매일 거울을 본다. 내 눈빛에 혹시라도 과거의 서늘한 그림자가 서려 있지는 않은지, 내 언어가 아이들에게 또 다른 부채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핀다. 보웬이 강조한 ‘자아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는 바로 이런 것이다. 가족이라는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에서 나를 분리해내어, 부모가 그랬을지라도 나는 다르게 반응하겠다고 선언하는 힘이다.
- 상처 입은 치유자의 유산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은 지독하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녀에게 화려한 재산이 아닌 ‘평온한 마음’이라는 진짜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
불행의 사슬은 그것을 직면한 자의 손에서 비로소 멈춘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멈춰 세운 그 상처의 파도가 내 아이들의 앞날에는 잔잔한 윤슬이 되어 빛나리라는 것을. 당신은 지금 어떤 유산을 준비하고 있는가. 당신의 대에서 멈춰 세워야 할 그 지독한 사슬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