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방주에서 내리지 않는 성도들

무너지는 성전 안에서 평온을 연기하는 자들

by 강훈

- 성벽은 무너졌으나 예배는 계속된다

목회자의 입에서 쏟아지는 야만적인 욕설, 자녀의 개척 자금으로 요구되는 거액의 사익, 그리고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선동적 궤변들. 교회의 상징인 목자가 양의 가죽을 벗고 본색을 드러낼 때마다 대중은 경악한다. 그러나 정작 더 기괴한 풍경은 그 성벽 안쪽에서 벌어진다. 명백한 도덕적 파산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예배당의 의자는 여전히 채워져 있고, 성도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찬송을 부른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다닌다"는 명분은 고결해 보이지만, 그 기이한 평온함의 이면에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과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 매몰된 시간과 공동체라는 요새

성도들이 문제 있는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삶의 총체성' 때문이다. 교회는 단순히 일요일에 한 번 방문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관계와 자녀 교육, 사회적 평판이 집약된 거대한 네트워크다.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기억과 든든했던 울타리를 한꺼번에 도려내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목회자의 허물을 '나의 삶'이라는 요새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부수적인 피해(Collateral Damage)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목회자의 타락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존재론적 공포'다.


- 도덕적 실명의 기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대 사회의 비극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어떤 대상을 도덕적 판단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어 '중립적인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범죄나 부도덕을 신앙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행정적 실수'나 '인간적 약점'으로 분리한다. 이 과정에서 목회자의 악행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야 할 ‘환경’이 된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러한 도덕적 실명은 인간이 체제 안에서 자신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비겁하고도 효율적인 적응 방식이다. 하나님을 보고 다니기에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방패 삼아 자신의 도덕적 판단력을 마비시킨 상태, 그것이 아디아포라의 함정이다.


- 침묵하는 방주는 어디로 향하는가

교회에 남는 것이 충성이고, 떠나는 것이 배신이라는 이분법은 리더십이 성도를 가스라이팅하기 위해 만든 가장 추악한 프레임이다. 진정한 신앙은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마당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었던 예수의 분노를 닮는 것이다. 불의한 목회자의 곁에 머물며 침묵하는 행위는 '관용'이 아니라 그 불의에 힘을 실어주는 '공조'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무너지는 요새 속에서 자신의 손익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