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끝에서 태어나는 재난, 혹은 기적

by 강훈

- 입술에 밴 습관이 만드는 가짜 지옥

“아, 죽겠다.” 이 말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튀어나오는 구조 신호다. 정작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진짜 벼랑 끝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법이니, 이 말은 대개 ‘나는 지금 몹시 버겁다’는 뜻의 관용구에 가깝다. 문제는 언어가 반복되면 그것이 현실을 덮어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잠언 18:21)고 경고한다. 평범한 하루의 굴곡마저 ‘죽겠는 하루’라는 필터를 통해 보면 재난으로 변질된다. 해석이 행복을 가두는 창살이 되기도, 풀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내뱉은 말이 내 삶의 색깔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언어의 두려움을 알게 된다.


- 마음이 부리는 위험한 마술

우리는 왜 이토록 쉽게 절망의 언어를 선택할까. 아론 벡(Aaron Beck)의 인지행동치료(CBT) 관점에서 보면, 이는 마음속의 ‘자동적 사고’가 일으키는 인지적 왜곡이다. 한 번의 실수를 인생 전체의 실패로 확대하는 ‘과잉일반화’, 혹은 오지도 않은 미래를 이미 파국으로 단정 짓는 ‘파국화’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감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잠시 멈추어 세우는 용기다. “지금 이 상황이 정말 죽을 만큼 비극적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읽고 해석하는 것인가?”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종이에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정의 파도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 엘리야의 로뎀나무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우리가 절망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양식(Explanatory Style)’의 문제로 보았다. ‘이건 영원할 거야(영구성)’, ‘모든 게 다 망했어(보편성)’, ‘다 내 탓이야(개인화)’라는 세 가지 습관이 우리를 무기력에 가둔다는 것이다. 신앙은 이 비극적인 설명양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준다.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꾸지람 대신 잠과 떡과 물을 주셨다(열왕기상 19:5-8). 위로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돌봄에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이다. 신앙은 ‘나 혼자 죽겠다’는 비명을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벅찹니다’라는 기도로 바꾼다. 주어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고통은 더 이상 파국이 아닌 ‘동행의 이유’가 된다.


- 당신의 오늘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가

결국 신앙이란, 나라는 사람이 결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태도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는 선언은, 우리의 유능함이나 성공 여부와 상관없는 존재의 귀중함을 말한다. 이제 언어의 방향키를 조금씩 손봐 주자. “죽겠다”는 말이 튀어나오면, 그 뒤에 질문 하나를 덧붙여 보라. “그래서 지금 내게 필요한 작은 은혜는 무엇일까?” 20분의 잠, 따뜻한 밥 한 끼, 혹은 누군가의 짧은 안부 문자 하나가 엘리야의 로뎀나무가 될 수 있다. 평강은 문제가 해결되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다른 품질의 호흡에서 시작된다(빌립보서 4:7). 오늘 당신의 입술은 죽음을 예행연습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을 마중 나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