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의 분주함보다 위험했던 ‘비교의 시선’

불평이 삼켜버린 감사의 식탁

by 강훈

- 노동을 모욕하는 설교들

교회는 그동안 마르다를 ‘일만 하느라 은혜를 놓친 사람’으로 너무 쉽게 몰아세웠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손님을 맞이한 집주인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자 아름다운 헌신이다. 예수님은 결코 마르다의 주방일을 탓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마르다의 손이 아니라, 그 손이 움직일 때 함께 끓어오른 ‘억울함’이었다. 아무리 귀한 봉사라도 그 안에 누군가를 향한 불평과 정죄가 섞이는 순간, 그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한 잔치가 아닌 자기 의를 증명하는 전쟁터가 된다.


- ‘좋은 편’을 망가뜨린 불만

성경 구절을 자세히 보면 마르다의 불만은 예수님에게로 향한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누가복음 10:40). 이 문장에는 자신이 하는 고생을 알아달라는 보상 심리와, 편안히 앉아 있는 동생을 향한 시기심이 뒤섞여 있다. 예수님이 지적한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누가복음 10:41)라는 표현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일을 하며 마음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마르다의 상태를 의미한다. 정성껏 준비한 요리가 불평의 원인이 된다면, 마르다의 ‘좋은 일’은 더 이상 ‘좋은 편’이 아니게 된 것이다.


- 마르다가 더 성숙했다

중세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이 본문에 대해 아주 파격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는 감정적인 달콤함에 빠져 예수님의 곁에 머물러야만 평안을 누리는 ‘초보’ 단계인 반면, 마르다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실천적’ 단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은 마르다의 일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지금 마르다의 마음이 불평으로 요동치고 있으니 잠시 마리아처럼 평온을 회복하라는 ‘긴급 처방’에 가까웠다. 즉, 핵심은 ‘일의 종류’가 아니라 ‘마음의 일치’다.


- 무엇을 하든, 당신의 마음은 평안한가

결국 예수님의 메시지는 “일하지 말고 내 말만 들어라”가 아니다. “일을 하든 내 말을 듣든, 네 마음이 나를 향한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하라”는 권면이다. 부엌에서 땀 흘리는 마르다가 미소 짓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다면, 그것 또한 마리아의 경청만큼이나 ‘좋은 편’이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혹은 삶의 현장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누군가를 향한 칼날이 되고 있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신앙의 중심은 얼마나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느냐, 찬양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의 평안을 지켜내기로 결단하는 그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