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악 vs 개인의 선의
“한 사람만이라도 제대로 서면 된다”는 말은 사실 기독교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꺼내 드는 가장 비겁하고 게으른 핑계다. 이 말은 거대한 시스템의 부패를 개인의 영성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아주 편리한 마취제와 같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선장은 도망치고 배는 쪼개지고 있는데, 승객 한 명에게 “당신이라도 중심을 잘 잡으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무책임한 방임이다.
- 개인의 경건으로 시스템의 악을 덮으려는 시도
교회가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마다 사역자들은 “나부터 회개하자” 혹은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구호를 외친다. 언뜻 겸손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교묘한 함정이 있다. 지도자의 권력 남용, 불투명한 재정, 수직적인 조직 문화 같은 ‘구조적 악’을 직시하지 않고, 이를 개별 신자의 마음 수련 문제로 뒤집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한 사람’이라는 강조는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던지는 영적 알리바이가 된다.
- 시스템의 중력 앞에 무력한 개인의 선의
한 개인의 선의는 견고하게 짜인 악의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구조적 제약’이라 부른다. 김문훈 목사 사태에서 보듯, 욕설과 폭언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한 사람’의 부교역자가 아무리 신실하게 행동한들, 그 시스템은 그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하고 폐기할 뿐이다. 썩은 물통에 깨끗한 물 한 컵을 붓는다고 물통 전체가 정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깨끗한 물마저 금세 악취에 오염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개인의 회복’만으로 거대 조직의 파산을 막겠다는 것은 순진함을 넘어 무지한 발상이다.
- ‘착한 신자’가 아닌 ‘주체적 불온함’의 필요성
우리가 말해온 ‘한 사람’이 만약 시스템에 순응하며 묵묵히 견디는 ‘착한 신자’를 뜻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교회는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침묵하는 다수가 괴물 같은 지도자의 권력을 유지해 주는 토양이 된다. 최근엔 김문훈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한다고 한다. 잘 길들여진 ‘착한 신자’들이 그렇게 침묵을 넘어 동조하는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과서적인 모범생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당함에 균열을 내는 ‘주체적인 불온함’을 가진 개인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남은 자’는 조직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조직이 진리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그 울타리를 걷어차고 나가는 개개인들이다.
- 무너지는 성벽 위에서 홀로 서는 법
과연 교회의 회복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이미 회복 불능의 상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신앙적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서의 ‘한 사람’은 교회를 재건할 영웅이 아니라, 폐허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최후의 보루를 의미한다. 신앙의 정수는 겉만 번지르르한 공동체의 회복에 목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 하나만이라도 ‘인간의 길’을 걷겠다는 단호한 결기에 있다. 그것이 비록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라는 인간이 괴물로 변하는 것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