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둥이를 든 하나님과 인질이 된 신앙

공포 마케팅이 삼켜버린 복음의 품격

by 강훈

- 공포를 신앙의 동력으로 삼는 ‘영적 가스라이팅’

목회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맞기 전에 돌아오라"는 식의 간증은 전형적인 공포 마케팅이다. 평안한 일상을 '매 맞기 직전의 위태로운 상태'로 정의함으로써, 신자들을 늘 불안과 죄책감 속에 가두어둔다. 이런 논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삶에 작은 불운만 닥쳐도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혼나고 있는 걸까?"라며 자기 비하에 빠진다. 이는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인질과 인질범'의 관계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 인과응보라는 이름의 ‘인식론적 게으름’

이런 극단적인 간증은 '환원주의적 사고'의 결과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질병, 사고, 실패에는 생물학적, 사회적, 우연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이를 모두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몰아넣는 것은 지적 게으름이다. 삶의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해 모든 사건에 억지로 '징벌'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인과관계를 조작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화는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길을 걷는 '보통의 신앙'을 초라하게 만들고, 극적인 사건이 없는 이들을 하나님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 타인의 고통을 도구화하는 ‘영적 아동학대’

가장 끔찍한 지점은 자녀나 가족의 아픔을 자신의 회개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해석하는 태도다. "내가 정신을 안 차려서 내 아이가 아팠다"는 말은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소품'으로 취급하는 일이다. 이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명백한 정서적 폭력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 아무 죄 없는 다른 생명을 고통에 빠뜨리는 잔인한 전략가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인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다.


- 매 맞는 종이 아닌, 고난을 함께 걷는 친구로

신앙의 주권은 공포에 질려 매를 피하는 비겁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단단함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앙을 던지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고난의 현장에 가장 먼저 와서 함께 힘들어하시고 격려하시고 우시는 분이다. 어떤 고난 속에서 돌이켰다는 것은 충분히 존중할 만 하지만 "하나님께 맞았다"는 근거 없는 변명을 버리고,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짜 신앙은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자유로운 응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