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의 합창
이미 준비된 관객 앞에서 박수를 받는 것은 실력이라기보다 특권에 가깝다. 교회라는 편안하고 보장된 울타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과 설교는 이미 정답을 공유한 이들끼리의 확인 학습이다. 하지만 그 울타리를 한 발짝만 벗어나면 분위기는 썰렁해진다. 대표적으로, 반강제로 앉아 있는 미션스쿨의 채플 현장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마주한 진짜 실력이자, 소통의 한계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모습이다.
- 손 짚고 헤엄치는 ‘안방 사역’의 함정
대부분의 기독교 사역자는 ‘준비된 청중’을 만나는 데 익숙하다. 찬양을 시작하면 이미 손을 들 준비가 된 사람들,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멘’을 장전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역자들은 자신이 대단한 영성을 가졌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는 온실 속의 화초가 숲의 생태계를 다 안다고 자부하는 것과 같다. 진짜 선교지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표정이 굳어지는 ‘비자발적 청중’들이 모인 곳이다.
- ‘한 영혼’이라는 구호 뒤에 숨은 무책임
그런 비자발적 청중이 있는 현장에서 사역자들이 가장 자주 쓰는 자기 위안은 “그래도 이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은혜를 받는다면 성공이다”라는 논리다. 지극히 신앙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지독하게 무책임한 통계적 회피다. 한 명의 회심자가 생길 확률보다, 억지로 자리에 앉아 소음 같은 종교 언어를 견뎌야 하는 수십 명이 기독교에 대한 평생의 반감을 품게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한 명을 얻기 위해 수십 명을 안티(Anti)로 만드는 사역은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역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적 폭력에 가깝다.
- 언어의 고립과 ‘세상 눈멀음’이라는 오만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소통의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특유의 단어, 말투와 감수성을 세상에 그대로 던져놓고,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세상이 눈이 멀어서 진리를 보지 못한다”고 정죄한다. 하지만 진짜 눈이 먼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물 안의 언어로 대중들과 대화할 능력을 상실한 기독교 자신이다. 외부 확장의 한계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이웃의 언어로 나의 진실을 설명해내지 못하는 지적, 감성적 불능에서 기인한다.
- 우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번역가’의 자세
기독교가 다시 숨을 쉬려면 ‘준비된 청중’의 박수 소리부터 잊어야 한다. 복음은 박수받는 무대가 아니라, 거부감이 가득한 현장에서 비로소 그 생명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이제 사역자들은 종교적 유리함과 편안함을 내려놓고, 세상의 상식과 보편적인 언어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내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가치는 우리끼리의 리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나를 거부하는 이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들의 언어로 끝내 사랑과 존엄을 이야기해 낼 수 있는 끈질긴 소통의 의지에 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