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아리랑

by 강훈

-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

미국 땅에 이민자로 살면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질문은 당연히 나의 ‘뿌리’에 관한 것이다. 어디서 왔냐고 물을 때 그냥 “Korea"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상대는 “North? South?”라고 물어본다. 그 해묵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우리가 이룬 눈부신 성취 뒤에 여전히 가려진 분단국의 아픈 그림자를 실감하곤 한다. K-팝이 세계를 휩쓴다지만 여전히 한국을 모르는 이들에게, 최근 광화문 광장에서 울려 퍼진 BTS의 ‘아리랑’은 그 어떤 외교적 노력보다 강력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SNS에서 보이는 다른 의견들이 있다. 이번 공연의 의도와 본질보다 교통 통제의 불편함이나 음향의 균열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 곁가지에 매몰되어 있어 솔직히 마음이 무겁다.


- 정체성이라는 치열한 몸부림

나는 솔직히 BTS의 팬이 아니다. 멤버 이름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아는 것도 별로 없다. 심지어 난 50대 아저씨 아닌가. 하지만 이번 광화문 컴백 공연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그런 것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아이돌의 무대가 아니라, 국가적 랜드마크 위에서 펼쳐진 우리 세대의 가장 세련된 정체성 선포였다. 고궁과 마천루가 교차하는 그 상징적인 장소에서 자신들의 뿌리인 ‘아리랑’을 노래한 것은, 더 이상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지 않겠다는 젊은 예술가들의 주권적인 선포이자 표현이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90개국에 생중계된 그 풍경은, 나에게 “North or South?”를 묻던 이들에게 한국이 어떤 정체성을 지닌 나라인지를 단번에 각인시킨 압도적인 장면이었다.


- 광장으로 나온 목적

무대 퀄리티나 음향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비판을 들으면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사방이 빌딩 숲으로 가로막히고 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개방된 광장에서 음악감상실 수준의 정교함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무도한 억지다. 그들이 안전한 실내 스튜디오나 방송국 무대를 버리고 굳이 광장으로 나온 목적은 ‘완벽한 박자’를 들려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거친 바람과 군중의 함성이 뒤섞인 그 현장감이야말로 이번 앨범이 지향하는 생동하는 한국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빌딩 숲 사이로 울려 퍼진 그 거친 선율은 매끈한 기계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강력한 에너지를 전 세계에 증명해 보이기에 충분했다.


- 진짜 가치를 알기는 할까

교통 통제의 불편함을 앞세워 ‘민폐’를 운운하는 논리는 참으로 옹졸한 편견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수시로 열리는 정치적 집회나 종교 행사가 유발하는 마비 상태에는 침묵하거나 관대하면서, 국가 브랜드의 가치를 수직 상승시킬 문화적 축제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성은 비겁하기까지 하다. 당일의 일시적인 정체가 향후 광화문을 세계적인 ‘핫스팟’으로 만들고,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이끌어낼 천문학적인 가치를 내다보지 못하는 시각이 안타깝다. 비본질적인 비판에 매몰된 이들은 이번 공연이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준 자부심과 전 세계에 각인시킨 한국의 이미지가 가진 무형의 가치를 계산에 넣지 못하고 있다.


- 우린 다음 세대를 정말 응원하고 있는가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닌, 타인의 성취를 온전히 품어낼 줄 아는 예의다. 정말 비판할 것이 있다면 가감 없이 해야겠지만 정말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새 앨범의 방향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가장 한국적인 장소에서 그것을 증명해 낸 젊은이들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지엽적인 실수나 기술적 한계를 찾아내어 어그로를 끄는 행위는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와 다름없다. 광화문 밤하늘을 수놓았던 그들의 몸짓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거대한 문화적 자산으로 고착될 것이며, 비난을 일삼던 소음들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이 먼 타국에서 광화문의 풍경을 떠올린다. 비본질적인 소음들이 잦아든 자리에, 기어이 살아남아 울려 퍼질 다음 세대의 ‘아리랑’을 응원한다. 본질을 꿰뚫는 혜안으로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자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