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기록물이라는 이름으로 봉인했던 ‘박근혜의 7시간’의 기록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채비를 마쳤다는 기사를 읽었다. 진실을 향한 한 걸음이 반가워야 할 자리에, 나는 기사 아래 달린 어떤 댓글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겹다’, ‘이제 그만하자’,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 어린 생명들이 차가운 물속에 잠긴 비극을 향해 ‘피로함’을 호소하는 그 무심한 문장들은, 법정의 판결보다 더 속이 타는 현실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의 고통을 두고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우리 사회의 공감 능력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낯 뜨거운 증거다.
- 차별받는 죽음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어떤 생명은 온 세상의 슬픔 속에 애도되지만, 어떤 생명은 그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받는 불평등한 현실을 지적하며 이를 ‘애도될 수 있는 삶(Grievable Life)’이라 불렀다. 세월호의 죽음들을 두고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의 심리 기저에는, 그들의 고통을 우리 공동체의 보편적인 슬픔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선 긋기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정치적 자산’이나 ‘비용’으로 바꾸는 순간, 그 생명은 애도될 자격을 박탈당한 채 한낱 지루한 숫자로 전락한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뜨리는 잔인한 폭력이다.
- 고통의 소비와 망각의 폭력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일회용 콘텐츠처럼 소비하는 비정상적 시대를 살고 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미디어를 통해 반복되는 비극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전달될 때 그 고통이 ‘스펙터클’로 전락하며 결국 무감각과 피로를 유발한다고 경고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정치적 어그로’로 치부하는 이들은, 사실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평안한 일상을 방해하는 소음 정도로 여기고 있다. 고통에 유통기한을 설정하고 강요된 망각을 종용하는 행위는, 유가족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시간을 조롱하는 행위이자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야만적인 태도다.
- 진실의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예의
단순 사고든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참사든, 밝혀지지 않은 의문이 있다면 끝까지 묻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며 남겨진 자들의 의무다. 이를 두고 지겹다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기를 멈춘 짐승의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정치적 이념의 틀에 갇혀 어린 생명들의 죽음조차 편 가르기의 도구로 삼는 현실은 참으로 참담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는 감각을 잃지 않아야만 비로소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향한 질문은 결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는 그런 참혹한 슬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다짐이어야 한다.
- 인간됨을 회복하기 위한 질문
나는 오늘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군가의 눈물을 지루한 배경음악으로 여기지는 않았는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경제적 혹은 정서적 편의를 위해 지워내려 하지는 않았는가. ‘지겹다’는 말 뒤에 숨은 우리의 비겁함을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없다.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고통 앞에서 기꺼이 그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는 것, 그것이 이 이기적인 야만의 시대를 건너 인간됨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타인의 비극 앞에 숙연해질 줄 아는 그 망설임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마지막 인감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