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나 근육통이 신앙으로 회복이 될까?

by 강훈

예배당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의 어깨는 생각보다 무겁다. 강단 위에서는 "주님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으라"는 선포가 울려 퍼지고, 지친 영혼들은 그 뜨거운 통찰에 눈물 흘리며 잠시나마 회복의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 기적처럼 사라졌던 허리 통증과 어깨의 뭉친 근육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영성이 육체의 고단함을 지워줄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몸은 정직하다. 기도가 진통제를 대신할 수 없고, 찬양이 근육 이완제를 대신할 수 없다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진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종교적 카타르시스와 몸의 배신

하루 종일 육체적 노동이든 정신적 노동이든 열정적으로 애쓴 날, 내 온몸은 불이 붙은 듯 뜨겁고 근육들은 돌덩이처럼 단단해진다. 이런 육체를 이끌고 예배 자리에 앉아 감동적인 설교를 듣다 보면, 묘한 고양감과 함께 피로가 가시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물론 나른해져서 졸기도 한다. 그건 솔직히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일시적으로 고통을 집중 마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마취'다. 신앙의 효능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 영적 고양감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역풍이다. 몸이 보내는 비명을 '은혜'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고 교회 생활의 강도를 높이다 보면, 어느덧 교회는 안식처가 아닌 또 다른 피로의 생산지가 된다. 피로가 누적된 몸은 결국 예배를 향한 마음까지 갉아먹는다.


- 몸의 주체성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을 단순한 고깃덩어리나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몸은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 그 자체다.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신실해도 그것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결국 '몸'이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의 고통과 피로를 무시한 채 영적인 회복만을 꾀하는 것은 세계를 지각하는 몸이라는 도구 자체를 파괴하는 모순이다. 근육통은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사라지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몸의 솔직한 언어다. 몸이 무너지면 그 몸에 깃든 영성 또한 뒤틀릴 수밖에 없다.


- 피로사회 속의 종교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을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 주체'로 정의했다. 안타깝게도 종교 역시 이 성과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뜨겁게 기도하고 봉사하며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좋은 신앙'으로 추앙받는 분위기 속에서, 휴식은 일종의 죄악이 된다. 일요일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밤늦게 돌아오는 것이 처음엔 제법 보람 있을 수도 있다. 왠지 교회라는 또 다른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소속감도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몸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번아웃(Burnout)에 직면한 이들에게 다시 예배와 봉사를 통한 회복이 요구되는 것은, 과열된 엔진에 계속해서 가속 페달을 밟으라는 것과 같다. 영적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에서 쥐어짜 내는 예배는 찬양이 아니라 신음일 뿐이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일명 ‘가나안 교인’들이 교회 일에 치여서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진정한 은혜는 우리를 다시 종교적 노동의 현장으로 몰아넣는 채찍이 아니라, 멈춰 서서 내 몸의 한계를 인정하게 만드는 돌봄이어야 한다.


- ‘쉼’은 또 하나의 진짜 예배다

건강한 신앙은 내 몸의 비명을 정직하게 경청하는 데서 시작된다. 예배를 통해 피로를 잊으려 하지 말고, 예배를 드린 뒤에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잠과 안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구별하여 정하신 이유는 인간의 노동이 끝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뭉친 근육을 풀고, 부은 다리를 올리고, 깊은 잠을 자는 행위는 세속적인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한계를 가진 인간입니다"라는 고백이며, 내 몸을 지으신 분에 대한 가장 실질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피로나 근육통은 은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자가 갖는 ‘쉼의 권리’를 통해 치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