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시와 인정욕구의 경제학
신혼부부도, 노부부도, 자영업자도, 회사원도, 우리는 모두 분양을 째려본다. 어쩌면 아파트 공화국에서 살아가면서 청약과 담쌓고 사는 것이 더 힘든 일일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파트 분양은 인생 최대의 풀 배팅이다. 분양가는 어떤지, 입지 프리미엄은 무엇인지 꼼꼼히 따지고 또 따진다. 인생 살면서 이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구매가 또 있을까? 그런데 도대체 왜 때문에 분양광고는 그렇게 천편일률적인지, 관점을 조금만 틀어도 특유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달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오늘 또 망상회로를 가동해 봤다. 병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부나 전공은 물어봐도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물어보는 것은 금기시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최근 6-7년 사이 집주소를 물어보는 것도 피해야 할 질문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사는 곳이 곧 사회적 위치이자 명함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조 섞인 이야기로 요즘 MZ회사원들은 선배들의 직급보다 어디에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실속 없이 회사에 충성하는 선배보다 자산이 많거나 재테크 노하우가 있는 인맥이 알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평생직장 개념도 사라지고 불경기가 당연한 세대에겐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월급만으로는 인플레이션과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는 숨 막히는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분양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축에 살고 싶은 욕망, 다른 하나는 시세 차익에 대한 기대다. 공산국가도 아닌데 우리나라는 신축 아파트 가격을 국가가 통제한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판매하지 않고 분양가 통제를 통해 흔히 이야기하는 '로또 분양'을 만들어내고 전 국민이 눈치게임을 한다. 어쨌든 다시 돌아와서 (1) 신축+(2) 시세차익 이 두 가지 이유 그 이면에는 결국 '남이 봐도 살고 싶은 곳'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다. 깨끗하게 잘 정리된 신축에서의 생활과 좋은 동네가 될 곳에 먼저 자리 잡아야 그만큼의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분양광고의 단골 멘트 중 하나는 '미래 가치를 선점하다' 류의 메시지다.
그래서 어쩌면 이 분양광고도 결국은 '그냥 집'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집'의 모습을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베블런 효과'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감소한다는 경제학의 기본과 배치되는 주장으로 '소스타인 베블런'의 이름을 딴 이론이다. 요약하자면 과시나 전시를 위한 소비는 결국 가격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더 잘 팔린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강남 초고가 아파트는 이제 필수재가 아닌 사치재의 영역에 들어간 지 오래고 부동산 침체기에도 신고가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조금 넓혀서 보면 수도권 핵심지의 청약 경쟁률과 지방의 미분양 아파트를 보면 분양시장의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나인원이나 한남더힐 이야기 하자는 건 아니고) 그래서 이 베블런의 주장을 분양광고 시장에 대입해 보면 어떻게 될까? 사치재에 대한 기준은 자기 주머니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집 마련은 인생 최대의 영끌 소비다. 따라서 이 소비(=분양)에 대한 기대치는 사치재가 주는 과시와 인정욕구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집’이 아닌 ‘남이 부러워할 집’으로 개념을 바꿔 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아래는 분양광고의 단골 멘트들이다.
막연하고 기시감이 느껴진다.
클래스가 남다르다/뛰어넘다
OO의 별이 되다/중심이 되다
강남을 단숨에/강남을 누리다/즐기다
한 수 위/ 자부심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기존의 카피에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하고 싶은 집’이라는 필터를 하나 씌워봤다
클래스가 남다르다 > 주변이 먼저 집들이 하자는
중심이 되다 > 인맥의 주인공이 되다
강남을 단숨에 > 좋은 사람들과 더 가까이, 더 자주
추상적이었던 메시지를 우리가 실제로 기대하고 있는 가치로 바꿔서 표현해 보았다. 더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을까? 이번에는 ‘명절 친척모임에서 은근슬쩍 말하고 싶은 집'이라는 필터를 씌워봤다.
클래스가 남다르다 > 사는 곳이 명함이 되는 곳
중심이 되다 > 모두가 아는 화제의 입지
강남을 단숨에 > 출퇴근이 즐거워진다
이렇게 아파트 분양이라는 이름 아래 숨은 과시와 인정욕구(베블런 효과)를 자극한다면 평범한 분양광고가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본질은 상품성에 있지만 대중에게 상품성을 검증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휘발되는 광고들이 너무 많다. 집이란 그 어떤 것 보다도 우리 삶 한가운데 있고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과시나 인정욕구가 없는 자존감 높은 사람일지라도 ‘내 집’이라는 대상 앞에서는 결코 쿨 할 수 없을 거다.
내가 아닌 남이 원하는 집이라는 프레임이 다소 씁쓸하기도 하면서도 결국 한번 더 사람들이 이목을 잡아끌고 한번 더 돌아보게 하기 위해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들춰봐야 하지 않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