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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Dec 04. 2015

첫사랑이 평생 기억에 남는이유

미완성에 대한 미련과 집착

"Zeigarnik Effect" (자이가르닉 효과)  한국말로 미완성 효과라고 불리며, 수행이 잘 된 일보다는 미완성이거나 실수가 있었던 일들을 더 잘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장근영, 심리학 오디세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룬 성취보다도 이루지 못한 것을 더 잘 기억하는 것 같다. 시험에서 100점 받은건 기뻐하고 금방 잊지만 99점을 맞은 건 아쉬워하며 꽤나 오랫동안 기억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본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살아가면서 처리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이미 이룩하고 성취한 것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처리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라는 조물주의 배려일 것이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평생 기억에 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떼긴 했지만 사실 이 글은 내가 사랑했던 어느 여인에 관한 글은 아니다. 이 글은 내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어떤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갖고 싶은 '꿈의 물건'이 있다. 오랜 시간이 동반된 깊은 고민이 없다면 굉장히 막연 모습으로 존재할텐데 (예를 들면, 아..좋은 집이 갖고 싶어. 좋은 차가 갖고 싶어)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자동차가 취미라면 꿈의 자동차가 있을 것이요, 오디오가 취미이면 꿈의 오디오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무척이나 갖고싶었던 카메라가 있었다.


나는 사진을 업으로 갖고 있지 않다. 그저 가볍게 취미로 즐길 뿐이다. 때문에 장비에 대한 욕심이 많지는 않다. 다만, 취미로 수행하는 작업의 강도가 높아지고 수입이 많아질수록 거기에 상응하는 수준의 장비 업그레이드에 대한 욕심은 조금씩 축적되었던 것 같다.


지금 갖고 싶은 카메라는 똑딱이 카메라 정도의 크기에 핸드폰 만큼 가볍고 망원에서 초광각을 커버하며 접사가 가능한 밝기는 1.4인 카메라다.이런건 다른 세상에서나 존재할 것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어떤 카메라가 나와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난 내가 어렸을때 갖고 싶었던 카메라를 잊지 못한다. 사진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때 그 정도 카메라면 정말 세상을 다 갖은듯 했을 것이다.


오래전 사진이라 출처를 모름..

그 이름은 바로 i4r (red)


사진에 한창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건 대학생 때였다. 사진이 왜 좋았냐고 묻는다면..'그냥..?' 이라는 시원찮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던 이시절, 나는 그당시 내 용돈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대략 10만원 상당의 카메라를 구입하고는 애지중지 여기며 취미활동을 즐겼다. 


초보수준의 실력을 벗어날 즘 나는 좀 더 그럴듯한 카메라에 대한 필요와 욕구를 느꼈고, 실제로 구입할 수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 없이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지며 내게 맞는 카메라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만난 것이 i4r 카메라였다. 


렌즈밝기나 화각 등 전문적인 카메라 스펙은 잠시 접어두자. 내가 이 카메라에 끌렸던 것은 순전히 디자인과 결과물의 색감이었다.


http://straysheep67.seesaa.net/


일단 디자인을 보자. 정말로 독특하다. 작고 얇게 쭉 빠진 것이 여성의 화장품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전체적인 만듦새는 굉장히 탄탄하고 베일듯 날카롭게 마무리되었다. 


카메라의 앞면에는 제조사 이름이 박힌 돌출형 카메라 덮개와 플래시가 있고, 그 아래로 렌즈에 대한 스펙이 짧게 정리되어 있다. 카메라의 뒷면을 보면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LCD창과 조작부 버튼, 그리고 좌측에는 칼짜이즈 T*렌즈임을 자랑하는 마크가 새겨져 있다. 


사실 예쁘긴 하지만 굉장히 불친절한 카메라다. LCD 화면도 작고 렌즈도 교환 불가하며 스펙도 떨어지고, 배터리 용량도 충분치 못하다. 하지만 단 한가지. 그 매력적인 외모가 모든 것을 가려버린다. 뭐랄까..조금 모자라지만 미치도록 예쁜친구..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두 번째로 반한건 바로 이 색감이다(Source:http://testors.net/) 카메라에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해 전문적으로 설명을 하긴 힘드나, 강렬한 명암 대비와 특히 빨간색에 대한 표현이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훌륭하다 좋다의 느낌이 아니라 인상적이다. 뇌리에 깊게 박힌다. 굉장히 강렬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나의 부족했던 실력을 감추기 위해 이런 강렬한 색감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디자인과 색감에 반하여 나는 이 때 부터 i4r 앓이를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카메라가 당시 단종되었다는 것.


내가 사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한참 전에 출시된 이 카메라는..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금방 단종되어버린 비운의 모델이다. 사실, 카메라의 스펙과 가격을 보면 범용성이 있어보이진 않는다.


덕분에 나는 중고제품이라도 구해야 했는데, 중고가가 만만치 않았다. 어렴풋이 기억하길..중고가격만 대략 50만원이 넘었고 신품에 가까운 제품은 그보다 수십만원은 더 값이 나갔다. 이정도 가격이면 당시 나에겐 입문용 DSLR을 구입하여 취미생활을 즐기기 충분한 돈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마로 그 매력적인 생김새와 색감이었다. 아무리 갖은 단점을 다 떠올리며 사지 말아야지 수십번 다짐해도, 메마르고 진득한 아스팔트 톤에 빨간색을 진하게 그어주는 그 감성은 어떤 카메라로도 혹은 보정 프로그램으로도 찍을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이 카메라만의 매력이었다. 


결국 난 이 카메라를 구입하지 않았다. 넉넉치 않았던 형편에 디자인과 색감을 제외하면 그리 내세울 것 없는 카메라에 50만원을 투자하기란 선뜻 내리기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몇 개월 뒤 나는 꽤 괜찮은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사진의 기초를 튼튼히 닦아나가기 시작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내가 큰 돈을 들여 i4r을 구입하고 사용했더라면, 디자인과 색감에는 만족했을지라도 결국 낮은 성능에 금세 질리고 다른 카메라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 다시는 i4r을 추억하지도 않았을 거고 이렇게 카메라에 대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잘되었던 인지도 모른다. 막상 구입해서 써봤으면 디자인과 색감보다는 그 불편함에 질렸을지도 모를 일. 첫사랑의 열병과도 같았던 이 것은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감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나오는 한 글귀가 떠오르는 밤이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words by

la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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