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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Sep 17. 2019

원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관점을 바꾸는 것의 어려움

이게 무슨 냄새지?


야근을 마치고 잔뜩 무거워진 몸을 엘리베이터에 태워 회사 로비로 내려온다. 외부로 통하는 빙빙 돌아가는 자동문을 보며 하루하루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회사원이란..


바깥공기를 맡는다. 야근 자체는 싫지만 뭔가 열심히 일했다는 착각 속에 코를 스치는 알싸한 밤의 향기는 달콤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끝없이 올라간다. 서울의 끝자락 내 집이 있는 곳. 만근추를 여기저기 매단 듯 제자리서 꿈쩍하지 않는 듯한 피곤한 몸을 억지로 잡아끌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태워 올린다. 현관에서 나를 반기는 자동센서 등이 오늘따라 반가운 하루.


곧장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냉수를 들이켜기 위해 냉장고를 향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간밤에 넣어둔 시원한 생수병을 찾는다. 삼*수를 사려다가 잘못산 탐*수. '삼*수의 짝퉁인가? 잘못 샀다 실수했네'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정들었는지 계속 이 녀석만 구입한다. 이래서 짝퉁 마케팅이 성공하는 건가 싶다.


1.5리터는 너무 크고 0.5리터는 너무 작다. 그래서 딱 들고 마시기 넉넉하고 알맞은 사이즈인 1.0리터를 산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야..' 자신을 칭찬하며 절반 남은 탐*수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리니 불현듯 싱크대가 보인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잦은 야근으로 미처 설거지를 못해 쌓인 각종 그릇들이 나를 반긴다. '어서 와 집안일도 마저 야근해야지' 주 52시간 법이 시행된 뒤로 회사는 정시퇴근을 눈치 없이 즐기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집안일은 그런 거 없이 24/365 계속된다. 보상 없는 재능기부 노동착취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봐주라. 내가 내일 일찍 퇴근하면 꼭 깨끗하게 씻어줄게' 마치 애완동물에게 말하듯 지저분한 자태로 싱크대 속에 널브러진 그릇들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며 다가간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냄새가 내 코를 스쳐 지나간다.


시각적으로 지저분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후각적으로 지저분한 혹은 불쾌한 것은 참기 힘들다. 뭔가 후각이 예민한 탓일까.. 이 날도 싱크대 쪽으로 가까이 가지만 않았어도 이 비극이 벌어지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어쩌랴. 난 다정한 말을 건네기 위해 싱크대 쪽으로 다가갔고 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그릇들은 '이거나 마시고 빨리 우릴 씻겨줘!!!!'라고 하는 듯한 공격적인 태도로 냄새를 뿜었다.


더 이상 이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던 나는 냄새의 원흉을 찾기 위해 주방의 이곳저곳을 스캔했다. 먹다 남은 음식이 문제인가? 그릇을 너무 오래 방치해서 냄새가 나는 건가?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냄새인가? 아니면..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올라오고 내려오는 냄새인가? 별의별 생각을 하며 일단 주방 테이블을 정리하고 시읏과 비읍을 연발하며 설거지를 시작한다.


그릇에서도 음식의 잔여물 때문에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박박 닦아 설거지를 마쳤다. 그런데도 계속 냄새가 난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여 싱크대 망을 청소해본다. 락스도 뿌려보고 곰팡이 제거제도 뿌려보고 싱크대 청소 제도 들이부어본다.


순간 사라진 것만 같던 냄새가 곧 다시 헤물러 헤물러 올라온다. 어디서 올라오는진 모르겠는데 뭔가 주방 중간 공기층에 계속 머물고 있다. 이쯤 되면 뭔가 더럽다며 다른 글을 읽으려 할 것 같다. 더러운 얘기는 곧 끝이 난다. 그리고 큰 깨달음이 찾아오니 조금만 견뎌보자.


그렇게 한 시간 반이 넘게 주방과 사투를 벌였지만 끝끝내 냄새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계속 헛발질만 해댔다. 그러다 문득, 정말 문득 눈을 주방 구석으로 돌렸는데 컵이 하나 보인다. 설거지 습관 상 컵을 제일 나중에 씻는 편인데 그 투명한 컵에 담긴 희뿌연 액체를 보는 순간 뒷골이 싸늘해졌다.


저건가..


가까이 다가가서 냄새를 맡아본.. 으악!!! 원인은 바로 그 컵에 있었다. 싱크대도 닦아보고 그릇들도 닦아보고 싱크대와 연결된 하수구에도 락스도 뿌려보고 세정제 뿌려보고 별 짓을 다 했는데도 잡히지 않던 냄새의 원인이 너무나도 어이없게 밝혀졌다.


컵에 담긴 오래된 정체불명의 액체를 버리고 나니 거짓말처럼 주방 공기가 다시 맑아졌다. 한 시간 반 동안 나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무언가 방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인생을 살면서 잡히지 않던 무언가의 원인이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것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나는 원인을 완전 잘못 파악하고 애먼 곳만 파고들어 힘만 빼고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증편향이라고 해야 하나.. 관점을 바꾸어 생각하는 건 정말 어렵다. 하지만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땐 몰입해서 파고들던 것을 잠시 멈추고 넓게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숨어있던 문제의 원인이 나타나지 않을까.. 평소 잘하지도 못하는 행동이지만 불현듯 그 컵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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