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이사 Mar 15. 2020

자기만의 세상을 끝까지 가진 사람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리뷰



여기, 세상을 다 가진 한 사내가 있다.

세상을 제패할 돈도, 가족도, 번듯한 외모나 야망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세상이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땅이나 국가, 심지어 작은 마을조차도 되지 못하는 바다 위의 배 한 척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크다면 클,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다 품기엔 너무나도 작은 것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어떤 세상. 그 세상을 온전히 살아낸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영화가 바로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다.


1. 자유인, 나인틴 헌드레드


영화의 주인공인 대니 부트먼 티디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Danny Boodman T.D. Lemon 1900)는 유럽의 이민자와 부호들을 꿈의 나라 아메리카로 잔뜩 실어다 주던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고, 박스에 담긴 채로 버려졌다. 갓난아기를 데려다 키운 건 배에서 일하던 노동자 대니 부트먼. 아빠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자기 이름과 아이를 발견한 박스에 적혀있던 상표명,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연도를 줄줄이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때부터 죽, 8살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로 한 번도 배에서 떠나지 않은 채 살아간다.



배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피아노 실력에 있었다. 배운 적 없음에도 피아노로 모든 사람의 모습과 여러 감정들을 말하고 표현할 줄 아는 재능이다. 어느덧 20대 청년이 된 나인틴 헌드레드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밴드는 옆에 있지만, 손님들과 함께 박수나 거들뿐. 우리의 피아니스트는 매번 악보와 다른 즉흥곡을 쳐 대면서 밴드를 따돌린 채 자기만의 창작세계를 펼쳐 보인다. 홀 안의 모든 이들이, 어느 땐 가난한 3등 칸의 이민자들까지도 다채로운 그와 그의 연주를 온몸으로 즐긴다. 배 안에서 나인틴 헌드레드는 연주하는 순간을 즐기는 자유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버지니아 호의 진짜 주인이다. 심지어 흔들리는 배 속에서 유유히 피아노를 타고, 치면서 놀다 유리창을 깨 먹어도 괜찮을 정도. 꿈만 같은 영화의 명장면이니, 동영상을 꼭 한 번 봐주시라!


https://m.youtube.com/watch?v=ciX08M-ZzyM


2. 바다 위의 자유에 갈증을 느끼다


만족, 만족, 만족, 웃음밖에 없을 것 같던 그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우는 시간이 있다. 바로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들이 기대와 환희에 찬 얼굴로 배에서 다 떠나버리는 때다. 사람들은 떠나고, 그는 여전히 배에 남는다. 배에서 산다. 함께 갑판에서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던 그는 친구인 맥스 튜니(Max Tooney)가 왜 배에서 내리지 않냐고 묻자, 육지 사람들이 ‘왜’라는 질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며 은근한 짜증을 내고 만다. 그가 '왜'라는 질문 같은 걸 스스로에게 하지 않는단 증거다.


그는 이 배 안에서 행복하고, 만족하려고 한다. 마침 그의 방이 스크린 속에 등장한다. 파리의 개선문, 아인슈타인과 합주한 자신의 사진, 버지니아호의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 또 셀 수 없이 많은 사진과 기사 조각들이 붙어있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무심해 보이는 나인틴헌드레드의 표정만 아니면 이대로도 완전해 보이는 하나의 세계다.


그러다 배의 흔들림에도, 사람들의 끝없는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를 동요하게 만드는 사람이 등장한다. 수십 년을 바다 위에서만 살아온 자기도 못 들어본 '바다의 소리'를 들어봤다는 어느 이탈리아 이민자다.


여러 도시들을 지나다 한 섬에 가게 됐고,
생에 가장 아름다운 걸 보게 됐지.
바로 바다였네. 번개를 맞은 것 같았어.
바다의 소리를 들었거든.
그건 마치 크고 강한 함성 같아.
계속 소리를 지르는데, '너 이 머리에 똥만 찬 놈아, 삶은 광대한 거라고!' 하는 거야. 이해했나? 광대한 거라고.
난 삶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고,
그래서 난 삶을 바꿔보기로 결정했어.
새로 시작하고, 삶을 바꾸라.
자네 친구에게도 그리 전하게.

대체 바다의 소리란 건 뭘까. 그런 게 존재한다는 얘길 듣기 전까지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 위에서도 바깥세상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직접 보고 또 밟은 건 아니지만,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삿거리를 섭렵한 덕에 무엇이든, 어디든 다 경험해본 것처럼 장광설을 늘어놓던 그였다. 그러나 바다의 소리란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가 자신에겐 허락하지 않았던 비밀이란 건, 그에게 그 어떤 간접적인 정보들로도 덧대어 메꿀 수 없는 갈증을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가 보겠다던 그가 한 말에서 그 갈증이, 혹은 해갈하리란 기대가 여실히 드러난다.


바다의 소리, 그건 큰 함성 같은 거야.
삶이 광대하다고 말하는.
이걸 들으면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지.
난 배 위에서만 머무를 순 없어.
그럼 바다가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거거든. 하지만 내가 배에서 내려서,
몇 년 정도 땅에서 살다 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해질 거야.
그럼 언젠가 나도 해안가에 가서 바다를 보고,  
바다의 함성을 들을 수 있겠지.

3. 큰, 육지의 사람들


배에서 내려보겠단 결정을 하기까지 나인틴 헌드레드는 육지에서 온 두 사람을 만난다. '바다의 소리'를 향한 갈증에 직면하게 해 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재즈의 창시자'라 불리는 거인이었고, 또 다른 이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주었단 측면에서 또 '큰 사람'이었다.


'재즈의 창시자'라 불리는 젤리 롤 모턴(Jelly Roll Morton)은 천재 피아니스트가 있단 소식을 듣고 버지니아호에 올랐던 거인이었다. 좌중을 압도하며 등장한 그의 연주에 나인틴 헌드레드는 경쟁심을 불태우긴커녕 감동받아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 모턴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던진 후 멋진 연주를 보이고, 홀의 사람들이 그에게 집중하며 연주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인 순간, (경쟁심보단) 묘하게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짓는다. 자기만의 세계, 자신이 주도해왔던 홀. 결국 나인틴 헌드레드는 모턴에게 '당신이 초래한 거다'라고 쏘아붙인 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곡을 연주해 압승을 거둬버리고 만다. 경쟁에서 패배한 뒤 배에서 내리는 '창시자'의 등에다 대고 'fxxk Jazz!'라고 외치며 자신의 승리를 확정 짓는 나인틴 헌드레드. 육지의 거인을 이긴 순간, 그는 어쩌면 자신이 육지에서도 배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란 담보를 얻었던 게 아니었을까.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란 류의 육지 식의 '좋은 삶' 말고, 어떤 부담도 없이 피아노에 취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단 버지니아호 식의, 이제까지 살아온 '자기 방식대로의 삶' 말이다.


https://youtu.be/FVdTXXAon9E

젤리 롤 모턴과의 피아노 대결


젤리 롤 모턴이 그에게 자신감 혹은 가능성을 보여 준 거인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그에게 육지로 가고 싶단 생각을 하게 해 준 이였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음반 녹음을 하던 중 원형 창문 너머로 마주치게 된 여인, 파도안이 그 사람이다.


https://m.youtube.com/watch?v=MUIgReYNMac&list=PLuwjlmV5VZ8drqf_bLZe1OtdH39C-_NKZ&index=2&t=0s

첫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피아노로 고스란히 표현하는 나인틴 헌드레드. 장면도, 음악도 아름답다.


알고 보니 그녀는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던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이었다. 그녀가 배에서 내리던 날, 나인틴은 자신이 녹음한 음반을 받아달란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한 채 당신의 아버지를 만났었노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을 건네본다. 그때 파도안은 아버지와 자신이 가게를 하고 있노라며 찾아오라고 주소를 말해준다. 모트가 27번지. '봐서요'라고 답한 나인틴은 이후로도 여전히 배에서 남아 열두 번의 항해를 더 한다.


그렇게 파도안을 잊은 것처럼 배 안에서 즐겁게 살던 그가 갑자기 육지행을 결심한다. 아까 그 '바다의 소리'얘기를 하면서 말이다(물론 튜니는 '그 여자 때문이다'라고 했다). 나인틴이 만약 그 길로 배에서 내렸다면,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동료들의 배웅을 뒤로한 채 육지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까지 걸어갔던 나인틴은, 거기서 걸음을 멈춘다. 잠깐 멈춰 서서 건물로 빽빽이 들어찬 도시를 지긋이 응시한 후, 모자 하나를 날려 (아마도 육지에게,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고한 뒤 다시 배로 돌아온다.


멈춰서서 바라본 도시. 그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


4. 자기만의 세상에서, 가장 자기 다운 모습으로


배에서 내리지 못한 후, 나인틴 헌드레드는 어떻게 되었나. 사실 영화는 시작부터 친구인 맥스 튜니가 폐기 직전의 버지니아호를 발견한 후 나인틴 헌드레드가 그 안에 있을 거라 찾아다니면서 교차 편집되고 있는 상황이다. 튜니는 폭파를 앞두고 다 비워진 낡은 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과거를 회상하고, 한때 나인틴 헌드레드가 녹음했던 음반을 틀어댄다. 오랜 친구를 끊임없이 불러댄 끝에, 결국 그는 숨어있던 나인틴 헌드레드와 조우하게 된다.


세상의 끝을 앞에 두고서야 나인틴은 자기가 왜 배에서 내리지 않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트랩(계단)에서 본 풍경은 멋있었어. 그런데 날 멈춰 세운 건, 내가 못 보던 세상이었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 말이야. 그 거대한 도시엔 끝이 없었어.
난 전혀 몰랐어, 세상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무서운지. 피아노를 봐,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어느 피아노나 건반은 88개야. 그건 무섭지가 않아. 무서운 건 세상이야.
막 배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수백만 개의 건반이 보였어. 너무 많아서 절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그걸론 연주를 할 수가 없어. 피아노를 잘못 선택한 거야. 그건 신이나 가능한 거지.

수천 개의 길거리, 어떻게 그것들 중 하나를 고르지? 한 명의 여자와 하나의 집..
어떻게 그들 중에 한 평의 땅과 죽을 장소를 고르냐고. 그건 너무 힘들어.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의 삶을 택할 수 있지?
난 이 배에서 태어났어. 여기서 계속 살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났지, 하지만 그들에겐 희망이 있었어.
적어도 이 배 안에서만큼은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고.

난 그렇게 사는 걸 배웠어. 육지는 내게 너무 큰 배야. 너무 예쁜 여자고, 너무 긴 여행이며, 너무 강한 향수고, 결국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더군. 그래서 난 배에서 못 내렸던 거야. 차라리 죽는 거라면 몰라도.


출생도 사망도 기록으로 남지 않을 사람. 튜니만 알고 있는, 그리고 결국엔 그도 언젠간 잊게 될 사람.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피아니스트. 육지로 가는 계단에서 돌아섰던 때처럼 자기만의 배에 남아있겠다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튜니는 끝내 막아서지 못한다.


배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아버지였고, 가족이었고, 마음껏 자기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거기서 그는 재즈의 창시자라 불리는 자를 이겼고, 거센 흔들림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은 채 피아노를 치고 또 걸을 수도 있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아는, 그만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배에서 내리기 전, 나인틴은 육지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육지는 너무나도 큰 불확실성들로 가득 찬 세계였다. 끝내 이해하지 못할 너무 큰 세상, 불확실성 속에서 더 이상 자유가 아니게 될 자유. 자유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는 세상은 결코 그에게 '평범한' 세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세상의 무한함(혹은, 무자비함)에 노출되며 적응해갈 있는 능력을 키워왔지만, 나인틴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가 자신의 재능을 끝없이 펼쳐나갈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않았든, 못했든, 그는 자신의 기준대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배에서의 삶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솔직히 처음엔 영화에서의 감동과는 별개로 그가 왜 더 살려고 하지 않는지, 도전하지 않는지 답답했다. 약한 소릴 한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그를 끌고 나오지 않은 튜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도 때때로 나인틴과 같은 결정들을 하면서 살지 않는가 싶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 평범함과 완벽함 사이, 물드는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것 사이. 결국 나인틴은 살아내야 할 현실을 회피한 게 아니라, 자신을 지탱해주는 가치들을 선택한 거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인틴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이 영화에 나쁜 사람은 없다. 육지로 돌아간 튜니도, 배에 남은 나인틴도, 각자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 뿐, 어쨌든.


그렇게 나인틴 헌드레드는

자기만의 세상을 끝까지, 다 가졌다.

그 품에 세상을 다 안았고,

다시 그 세상의 품에 안겼다.



RIP.




* '시네마 천국', '말레나' 등을 찍은 쥬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감독 작품이다.

*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킨다. 아니, 음악이 반이다..! (혹은 그 이상..?) 음악을 들으려면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치기보단, 'The Legend of 1900 -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1990) - Ennio Morricone' 음반을 찾아 듣길 추천한다. 참고로 튜니와 피아노를 타던 때 쳤던 음악(Magic Waltz)나 Tango Night 등은 Jacob Koller의 'Cinematic Piano - THE PIANIST(2014)'에 수록되어 있는 걸 추천한다.





작가의 이전글 그의 시를 미워했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