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종교가 있는 게 훨씬 이득이다.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는 Kick the Bucket(양동이를 발로 차다)에서 욌다. 중세시대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고 양동이를 차 버리는 행위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를 알게 해 준건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버킷리스트(2008년, 로브 라이너 감독)’였다. 40대였다. 그 때 이 영화를 볼 때는 한창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을 때라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곳을 다 가보고 싶었다.
에드워드(잭 니콜슨)와 카터(모건 프리먼)는 암 병실에서 룸메이트로 만난다.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한 억만장자고 카터는 차 정비사다. 둘 다 의사로부터 길어야 1년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역사 교수가 되고 싶었던 카터는 티브이 퀴즈쇼의 정답을 다 맞히는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아내가 임신하는 바람에 돈을 벌어야했다. 그는 다시 공부하고 싶었지만 45년이 흘러가버렸다고 한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성실하고 가정적인,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위트 홈’의 전형적인 가장이다.
반면 괴팍한 성격의 에드워드는 네 번이나 결혼했었지만 혼자 산다. 성공적인 결혼은 일과 한 결혼뿐이라고 한다. 그는 자살을 생각한다. 그러다 우연히 카터가 적은 버킷 리스트 메모를 보고 둘은 실행에 옮긴다. 둘은 돈 걱정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카터는 사후세계를 믿는 기독교인이고 에드워드는 믿지 않는 무신론자다. 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다. 카터는 바르게 살려하지만, 에드워드는 돈은 많지만 죽으면 끝이라 생각하고 비행기 화장실까지 콜걸을 불러들이며 막산다.
프랑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캐비어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아프리카에서 사파리 여행을 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올라간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중국의 만리장성에도 간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홍콩으로 가서 실크 양복을 입고, 검은 호두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한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산 콜걸을 카터가 거절하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카터는 그 콜걸로 인해 잠시 소원했던 아내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카터는 가족들과 만찬을 즐기지만, 딸과 오래 전에 절연한 에드워드는 혼자 냉동 인스턴트 요리를 먹으려다, 외로움에 운다.
카터가 먼저 죽으면서, 에드워드에게 '삶의 기쁨'을 찾으라는 편지를 남긴다. 에드워드는 딸과 화해하고, 손녀와도 만나게 된다. 에드워드는 카터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믿는다. 에드워드는 5월에 죽었고, 그의 비서가 커피 깡통에 그의 유골을 넣어, 이미 커피 깡통에 넣어져 히말라야 산에 묻혀 있는 카터 옆에 그를 안치하는 게 라스트 신이다. 살아생전 최고급 '코피 루왁'만 먹던 그는 평소 친구가 먹던 싸구려 커피 깡통에 담겨 친구 옆에 눕는다. 이 영화는 버킷리스트를 빙자한 ‘영혼의 구원’에 관한 영화다.
40대 때 이 영화를 볼 때는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도 가고 싶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올라가 보고 싶고, 인도의 타지마할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보니 아프리카와 이집트와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지 못했고, 티베트에도 가보지 못했다. 잠깐 한 눈 팔다 돌아보니 이순 중반이 되었다.
3년 전에 내게도 암이 찾아왔다. 한 쪽 유방을 절제(切除)하고 보형물을 넣었다. 외과수술을 5시간하고 성형수술을 2시간 했다. 7시간 동안 삶과 죽음의 회랑을 서성였다. 다행히 다른 세상으로 가지 않고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 항암 약을 먹으며 6개월마다 검사를 받으러 간다. 그때마다 내 삶도 6개월씩 유예된다.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창밖을 보며 오래된 벗과 커피를 마신다. 벗은 카페라떼 아이스를, 나는 뜨거운 카페라떼를 마신다. 점심으로 마르게리타 피자와 크림 파스타를 먹은 후라 커피는 고소하니 맛있다.
- 넌 버킷 리스트가 뭐야?
벗이 묻는다. 버킷 리스트라.
언제부턴가 하고 싶은 게 없어졌다. 돈이 엄청 많다면 조금 달라지겠지만, 현재의 나는 원도 한도 없다. 언제나 내게 다가오는 인연에 집중했고, 내게 닥쳐오는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했다.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글쟁이들은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안다. 그 상처가 아물어 질 때까지 온 몸으로 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사이 가슴에는 문장들이 고이고, 그 문장들을 토해내는 과정을 거치면 대나무의 매듭처럼 내 내면은 한 마디가 쑤욱 자라나 있곤 했다. 그 매듭들이 있어 엔간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가 난 곳이 바로 빛이 들어오는 곳이다’.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글귀다. 성경 말씀 같다. 그러므로 상처는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도구인 셈이다.
난 가톨릭 신자지만 천국을 믿지는 않는다. 천국은 다만 착하게 살아라, 는 종교의 방편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양자물리학을 믿는 쪽이다. 우리의 몸이 조건에 의해 만났다가, 죽으면 원소로 쪼개어져 다시 우주의 기운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하늘나라(우주)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다시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빅뱅이 일어나면 우주의 입자들은 비슷한 원소들끼리 조합이 되어, 어느 순간 생명체로 탄생할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다시 크로마뇽인(유럽 최초의 현생 인류)부터 시작하는 거지. 선한 원소들은 선한 원소들끼리 악한 원소들은 악한 원소들끼리 조합되어서 말이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삶에 따라 더 좋거나 더 나쁘게 환생한다고 믿는다. 윤회 또한 불교라는 종교의 방편일 뿐이라 생각한다. 기독교든 불교든 교리들이 얼마나 근사한가. 기독교는 착하게 살면 천국을 가고, 불교는 착하게 살면 더 나은 삶으로 윤회를 한다니. 두 종교는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위무하기 위한 말씀들인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축복 받은 자들이다. 믿음이 없는 억만장자 에드워드는 믿음이 있는 가난뱅이 카터를 부러워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늘 기도를 한다. 기도란 자기성찰의 기능이 있다. 자기반성을 하는 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러니 믿음이 강한 자는 불안하지 않다. 믿음이 없는 에드워드는 가진 돈으로 물질적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자기반성이 없는 가슴엔 감사함이 없다. 평화 또한 없다. 불평불만만이 가득하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종교가 있는 게 훨씬 이득이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다. 별리가 아픈 거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슬픔인 거지. 불교의 방편을 빌려 다음 생에 만나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지 않은가. 무슨 증표를 쥐고 죽을 수도 없고. 전생의 습(習)이 남아 있다하니, 기시감이 드는 사람을 만나거든 어느 생에서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기 바란다.
나에게 버킷리스트가 하나 있다면, 죽기 전에 뉴욕에 사는 ‘내 친구 J'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 외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건 없다. 이번 생에서는 해 볼만큼 해 본 것 같다. 이 쯤 되면 인생을 잘 살은 건가, 헛살은 건가. 욕망이 멈춘 것인지 청춘이 끝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평화가 오기까지 60년이 걸렸다.
싱글인 나의 벗은 죽기 전에 자신을 알아봐 주는 로맨틱한 남자와 원도 한도 없는 사랑을 해 보는 거라고 했다.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봄날처럼 환하다. 버킷리스트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게 희망이 아니던가. 희망은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쇼펜하우어).
문득 버킷리스트 보다 앙코르리스트를 적어 본다.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봄날이면 청춘이 참으로 짧다는 걸 절감한다. 아름다웠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그 공간으로 다시 가 볼 수는 있다. 봄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이 봄날이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