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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스토너'에게 기립박수를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한 남자의 일생

  아마 신문 서평을 보고 샀을 것이다. 늘 책을 산다. 일주일에 한 번 씩 나오는 신간 안내와 서평 난을 꼼꼼히 읽으며 살 책을 메모해서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다. 당장 읽을 시간은 없어도, 읽고 싶은 신간은 사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 책을 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물건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는데, 책에 대한 욕심은 과소비에 가깝다. 한 달에 사들인 책을 대부분 다 읽지 못한다. 그래도 사둬야 안심이 된다. 시간이 날 때 천천히 읽기 시작하지만, 사실 새로 산 책들과 낯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사도 금방 입고 나가거나 신고 나가지 않는다. 그 물건들과 낯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주일이나 열흘 쯤 옷장을 열고 혹은 신발장을 열고 한 번 입어보거나, 한 번 신어보고는 도로 넣어 두며 낯을 익힌다. 가방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낯을 익힌 후부터는 엄청 아끼며 오래도록 같이 간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같이 산 책들은 거의 읽었다. 산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또 새 책을 사기 때문에 딱히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같이 산 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와 ‘파울로 코엘료’부터 집어 들었을 것이다. ‘하루키’와 ‘코엘료’ 책은 하루에 다 읽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책을 빨리 읽지도 못한다. 묘사한 문장이 내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혹은 심리 묘사의 감정이 내게 이입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 버릇이 있다.


  너무 빨리 책장이 넘어간다 싶으면 딴 짓을 하면서 잠시 독서를 쉰다. 사실 ‘하루키’나 ‘코엘료’도 예전처럼 미친듯이 읽히지는 않는다. 읽다가 덮어두고 일주일이 지날 때도 있다. 그러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눈에 들어 왔다. 화장실에 가면서 그 책을 들고 들어갔다. 언제 샀던 책인지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토너’가 무슨 뜻이지?, 인터넷에서 찾아볼까?,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책 뒷 표지에 실린 뉴욕타임스의 서평을 보고 ‘스토너’가 사람이름인 줄 알았다. 책 디자인도 마음에 든다. 하얀 표지에 4B 연필로 사람 얼굴을 스케치하고 얼굴의 삼분의 일 쯤은 쌓아놓은 책으로 가려져 있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책 디자인도 매우 따지는 편이다. 한 참 하드보드지로 만든 양장본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독자로서는 양장본이 책 읽을 때 무겁고 불편할 거 같지만 오히려 책을 펼치고 독서를 해본 사람이면 양장본의 제본이 훨씬 읽기 편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원래 소장용으로 튼튼하게 만드는 것을 양장본이라고 한다.  양장본으로 제본한 책은 잘 펼쳐진다. 그러나 그냥 보통 종이로 제본한 책은 잘 펼쳐지지 않는다. 그게 싫어 책을 무리하게 펼치려다 책이 두 동강 나기도 한다. 그러다 재수 없으면 책이 낱낱이 떨어지기도 한다. 양장본 책은 장정도 예쁘고 책 보기도 편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또한 너무 하얀 종이보다는 연한 미황색의 재생지가 눈을 덜 피곤하게 한다. 나도 책을 열권 가까이 출간해 보았지만, 내 마음에 완벽하게 드는 책 디자인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디자인을 출판사 사장이나 편집장이 강하게 밀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책에도 운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니 ‘스토너’를 향한 언론과 문단의 찬사가 두 페이지나 이어졌다. 뒷 표지에서 대충 본 것이라 건너뛰었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라는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세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나는 그 자리에 퍽 주저앉듯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컬럼비아에 올 때 그는 시어스&로벅의 우편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한 검은색 브로드클로스 양복을 가져왔다. 어머니가 달걀을 팔아 번 돈으로 사준 옷이었다. 아버지가 입던 낡은 외투, 그가 한 달에 한 번씩 분빌에 있는 감리교회에 갈 때 입던 파란색 서지 바지, 하얀 셔츠 두 장, 갈아입을 작업복 두 벌, 아버지가 가을에 밀을 수확해서 갚기로 하고 이웃에서 빌려온 현금 25달러를 가져왔다. 아침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가 농사를 지을 때 쓰는, 노새가 끄는 짐마차로 그를 분빌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는 거기서부터 도보로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어머니가 달걀을 팔아 번 돈으로 사준 옷이었다, 라는 문장부터 울컥 눈앞이 붉어지다가 끝내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1965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50년간 묻혀 있다가  2006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판으로 재출간 되면서 전 세계를 매료시켰다. 1994년 작가 존 윌리엄스가 작고하고도 한 참 후의 일이다.


  나는 아스팔트 키드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 아니지 다섯 살까지는 과수원을 하는 시골에서 자라긴 했다. 그러나 농촌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렇긴 해도 농경사회을 이해할 수 있다. 베이비 붐 세대(1955년부터 1963년 사이 출생)는 농경사회와 산업화 사회와 정보화 사회를 다 거치며 살아가고 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이런 세대는 드물 것이다. ‘스토너’를 읽고 위의 문단에 눈물 흘릴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천천히 읽었고, 행여 빨리 다 읽어 버릴까봐 반쯤 읽은 책을 멀찍이 밀어 두기도 했다. 그러나 상담일을 끝내고나면 어느 새 또 ‘스토너’를 읽고 있었다. 이렇게 미친듯이 나를 빨아들이는 책은 고등학교 때 읽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책을 아껴가며 읽기 위해 책을 덮고 길 건너 공원을 한 바퀴 산책을 하고 오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커피와 물만 먹었다. 머리가 투명해지고, 정신이 명징해졌다. 가슴이 충만해져 ‘책읽기의 즐거움’을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았다.


  언제부턴가 책을 동시 다발적으로 읽었다. 옛날에는 책 하나를 몇날 며칠이고 끝까지 봤는데, 요즘은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이 책을 읽다가, 저 책을 읽는다. 어느 날 쌓여져 있는 책을 보니 책갈피에 클립이 끼워져 있는 책이 일곱 여덟 권이나 되었다. 독서력이 그만큼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말이겠다. 아니면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문자’를 빨아들이던 영혼이 조금 더럽혀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약간’ 더럽혀져 있는 영혼을 매료시킬만한 책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토너’를 집어든 순간부터 나는 ‘스토너’만 읽었다.  


  농부의 아들 윌리엄 스토너는 열아홉 살 때 농업을 공부하려고 미주리 대학에 입학하지만, 셰익스피어를 만나 영문학자가 되어 교수가 된다. 어쩌다 악처를 만나게 되어 가정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게 되고, 직장에선 자신의 신념과 윤리관을 굽히지 않아 동료 교수들로부터 왕따를 당한다. 그는 그 무엇과도(사랑조차) 타협하지 않고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며 자신만의 길을 걷다 암으로 죽는다. 


  ‘스토너’를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했던 것은 바로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올해로 등단 한 지 30년이 된다. 수많은 나날이 오고 갔지만, 돌아보면 ‘하루’처럼 살은 느낌이다. 그 동안 삶의 파도가 열두 번도 더 나를 허공에 말아 올렸다가 사정없이 내동댕이치곤 했다. 이사는 열세 번 쯤 다녔고, 식빵 살 돈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삶이 나를 망망대해로 저만치 떠밀어내도, 어느 순간 나는 ‘책상’앞에 앉아 있었다. ‘스토너’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그냥 글 쓰는 게 내 ‘길’이니까 그 길을 가는 것이다. 


  돈도 안 되고 훌륭한 작품을 쓰지도 못한다면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저잣거리에 나가 돈을 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럴 용기도 자신도 없었으므로 ‘스토너’처럼 고개를 수굿이 숙이고 온갖 비난과 왕따를 견디며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스토너’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그는 곤궁한 생활에 대한 ‘조용한 슬픔’을 뼛속까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만나 교수가 되지 않았으면 농부가 될 사람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겪은 절망적인 가난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가난은 인간(그의 부모가 그러 했듯)을 노동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형장에 끌려가듯 남에게 빵을 구걸하러가는 사람들의 공허한 눈빛’을 알고 있었고, 보잘것없는 종신교수인 그를 ‘부러움과 증오’로 바라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일이 ‘파괴’되는 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또한 일생을 ‘하루’처럼 살아냈다. 죽는 순간 그는 자신이 삶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저술한 책이 아무런 가치도 없이 망각 속으로 묻힌다하더라도, 그의 작은 일부가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세속적인 회한이 없다. 그의 영혼은 깨끗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났다.  


  존 윌리엄스는 한 남자의 일생을 숨 막힐 듯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촘촘하게 그려냈다. 마치 바늘 하나로 거대한 호수를 파듯이 말이다.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소설가란 바늘 하나로 호수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얼핏 평범한 한 남자의 초상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의 학문에 있어서는 언제나 파랗게 불타고 있었고, 그걸 학생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자신의 길을 벗어나지 않은, 한 생명체의 삶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든다. 이 책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그에겐 어떤 순간에도 그의 편을 들어 주는 한 명의 친구가 있었고, 영원히 그를 기억하는 한 명의 연인이 있었으니, 그만한 삶이면 모두의 기립 박수를 오래도록 받아도 될 것 같다. ‘스토너’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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