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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차타레부인의 사랑

육체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나지게 마련이다

   D.H 로렌스가 42살에 쓴 소설이다. 1928년 당시 영국에선 외설 판정으로 판매금지를 당했다가 1960년에 비로소 출판을 할 수 있었다. D.H 로렌스는 이 작품을 완성한 2년 뒤인 1930년에 4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사실 나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20대 때 영화로 봤다. 1981년 ‘쥬스트 쟈킨’ 감독이 미국에서 제작했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크리스탈 같은 푸른 눈. 전 세계 남성들의 가슴에 에메랄드빛 크리스탈 하나를 심어놓은 그녀. 2012년 60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전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호 클리포드(샤인 브라이트 분)경은 코니(실비아 크리스텔 분)와 결혼하지만 이내 전쟁에 참전해서 하반신 불구가 되어 돌아온다. 젊은 코니는 숲 속에 사는 사냥터지기인 멜로스(니콜라스 클레이 분)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보다 ‘불륜’을 저지른다고 해야 더 적확할 거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냥터지기의 이름 ‘올리브 멜로스’ 조차 모른 채, 몸부터 사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적인 사랑에서 시작하여 정신적인 사랑으로 가기도 한다. 사랑의 형태는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법이니까.


  클리포드는 코니에게 정부(情夫)를 두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멜로스가 귀족이 아니란 점을 들어 그녀를 언니에게 보낸 후 멜로스를 해고한다. 임신한 걸 안 코니는 다시 돌아와 멜로스를 찾아 함께 떠나는 게 영화의 끝이다.


  아마 이 작품이 영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면, 다분히 여자의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만약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지 못했다면 이 소설은 그저 그런 통속소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D.H 로렌스는 상식과 통념을 벗어나 여성의 진정한 성적 본능에 대한 애욕(愛慾)를 그려냈던 것이다. 코니는 멜로스와 사랑을 나눈 후, 남자와의 잠자리가 뭔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20대 때는 나 역시 저 대사가 무엇인지 알 지 못했다.


  신분을 뛰어 넘는 사랑이라든지, 산업화가 진행되는 근대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통속적 비평’ 따위를 할 마음은 없다. 20대 때 전혀 몰랐던 성과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20대 때 봤을 때는 코니가 멜로스에게 달려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코니가 멜로스에게 달려가는 이유를 안다. 몸의 쾌락과 정신의 쾌락 중 어느 것이 힘이 셀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나이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저 영화를 삼사십 대에 봤더라면 멜로스에게 달려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성의 성취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20대와 이미 뜨거운 성의 사막을 지나온 50대는 멜로스에게 달려가는 코니가 안타깝다.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쓴 D.H로렌스도 44세에 작고했으니, 그도 뜨거운 성의 사막을 통과해 보지 못하고 쓴 작품이다.


  코니는 어느 날 클리포드에게 돌아갈 것이다. 물론 클리포드가 그 때도 받아준다면 말이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 사랑이 끝나 버린 후, 다시 말해 몸이 식은 후, 사냥터지기에서 산업사회의 노동자가 된 멜로스(영화에서는 과수원을 하며 살아갈 것으로 끝이 난다)는 코니에 대한 권태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며 밖으로 나돌 것이다. 


  귀족 부인이었던 코니의 고상한 취향과 노동자인 멜로스의 삶과 사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고, 하인이 차려준 식사를 하며, 운동으로 승마를 하고, 피아노를 치고, 독서를 하며, 사람들과 파티를 열어 ‘토킹 어바웃’을 즐기며,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브라우스와 모직 가디건과 우아한 모자와 망토를 걸치고 산책을 하는 여자였다.


  이 영화에서 궁금한 것은 그렇게 섹스를 잘하는데 멜로스의 아내는 왜 달아났을까? 그러니까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도 없고, 자유만으로 살 수도 없고, 섹스만으로 살 수도 없는 것이다.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겠다며 코니는 멜로스를 선택한다. 어쩜 차타레 부인 코니는 ‘노동’으로 살아야하는 삶에 지쳐 그 날의 선택을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좋은 사람들이 번듯한 생활에 대한 꿈이 깨지면서 함께 망가져서 서서히 절망을 향해 스러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스스로 처형장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자존심을 품고 남의 집 뒷문으로 다가와 빵을 구걸했다. 그것을 먹으면 다시 구걸에 나설 기운을 얻을 수 있는 터이니.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건 신의 축복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불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상을 향해 가지 않으면 더 큰 대가를 지불한다. 내 삶을 허비했다는 것.’ 이상(사랑)을 향해 갔을 때 삶이 망가지고, 모든 걸 잃는 것 보다, 더 큰 대가는 자신의 삶을 허비했다고 후회하는 거라는 말은, 다시 말해 내 삶을 지키는 게 훨씬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다.


  차타레 부인 코니도 사냥터지기 올리브 멜리스와의 사랑을 따라가지 않았으면 우리들의 기억에 더욱 아프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불륜이 그나마 우리들 뇌리에 남아 있는 건 ‘프란체스카’가 ‘킨 케이드’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킨 ‘고통’ 때문이 아닐까.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선택은 그 때가서 생각할 테니 제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만 해 달라고.   


  ‘데미지’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봤다. 그런데 책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책속의 남녀 주인공들을 연기한 배우들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데미지의 ‘제레미 아이언스’(아, 얼마나 매력적인지)와 ‘줄리엣 비노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역시 영화는 종합예술인가보다. 아마 책보다 영화를 더 잘 만들었을 경우에만 그럴 것이다. 아니면 그 주인공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뛰어났을 때, 책 속의 주인공의 이미지는 곧바로 그 배우가 연기한 이미지로 옮겨가 뇌리에 박히게 된다. 


  사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영화보다 책이 좋았다. 메릴 스트립은 괜찮았는데, ‘킨 케이드’ 역으로 나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책 속의 ‘킨 케이드’ 보다 매력적이지 않았다. 매력적이란 건, 지적인 분위기와 성적인 분위기가 잘 조화를 이룰 때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 지적이기만하면 지루하고, 너무 성적이기만 하면 천박하지 않은가 말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적이긴 했으나, 성적인 매력은 떨어졌다. 그는 이 영화의 감독만 했어야 했다.  


  ‘차타레 부인의 사랑’에서 귀족으로 분한 ‘샤인 브라이트’는 금방 깨어져 버릴 것 같은 유리처럼 너무 지적이기만 했고, 사냥터지기로 분한 ‘니콜라스 클레이’는 너무 성적이기만 했다. 어쩜 감독은 배우를 그렇게 잘 캐스팅 했을까.


  만약 나에게 귀족과 사냥터지기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사냥터지기와 한 십년 살다가 귀족에게 돌아갈 것이다. 육체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나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을 포함한 지적놀이의 취향이 같은 사람은 질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취향은 귀족과 더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 한 십년 사냥터지기와 살다가 귀족과 노후를 보내고 싶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이다. 낮에는 귀족과 생활하고, 밤에는 사냥터지기와 생활하고 싶다, 고 말하면 나를 죽이려 들것이다. 나를 죽이려 하지마라. ‘가능하다면’이라고 전제를 붙이지 않았는가.  


  운명적 사랑(불륜)을 선택했을 때 삶은 망가지고, 사랑을 외면했을 때는 자신의 삶을 허비했다고 후회하게 된다고, 파울로 코엘료가 말했다. 이글을 읽는 당신이 진정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바로 이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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