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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나는아직도비구니가되고싶다

나는 아직도 비구니가 되고 싶다

  작고하신 소설가 최인호 선생의 수필집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라는 책이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생사의 허물을 벗기 위해 백척간두에 홀로 서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시퍼런 중, 한참을 살다가 언제 가는지도 전혀 모르게 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왔다가 물 위에 비친 기러기처럼 사라지는 중, 법문이고 나발이고 누가 물으면 그저 천치처럼 살다가 잠시 나와 노는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혼자서 물에 비친 얼굴 들여다보면서 빙그레 웃는 그런 중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최인호 선생은 좋은 건 혼자 다 하고 싶다고 했다. 수(壽)를 못 누리셨지만, 작가로서 그만한 삶이면 황제가 안 부러운 한 생을 살다 가셨다고 생각한다. 내 나이 마흔 즈음 그 책을 접했을 때, 와락 질투가 났던 기억이 새롭다. 나야말로 ‘아직도 비구니가 되고 싶다’. 최인호 선생처럼 그렇게 멋진 중이 아니고 그저 3초마다 찾아오는 이 삶의 번뇌를 내려놓을 수 있는 평온한 비구니가 되고 싶다.


  돌이켜보면 내겐 절에 대한 향수가 있다. 겨울철 절집 사랑채 툇마루에 비춰드는 따스한 햇살과 여름이면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적요만이 가득한 공간의 멈춘 듯한 시간들. 신 새벽의 아득한 예불소리. 불목하니 아저씨가 생소나무로 깎아준 나무인형. 그 각시 인형을 오래도록 간직했었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저승인 듯 들리는 소쩍새소리. 어린 마음에도 그 순간 그곳이 참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큰 무당이었다. 어머니의 생모는 아니었다. 그 사실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릴 때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 방에 모셔져 있는 법당이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신 새벽마다 물을 떠놓고 기도를 했다. 나는 어쩐지 그 기도소리가 좋아 늘 자는 척하며 외할머니 방에서 그 기도소리를 들었다. 외할머니는 돈을 많이 벌어 팔공산 자락에 ‘연화사’라는 절을 지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미혼모들을 보살피는 쉼터로 내어 주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는 조계종으로 넘어갔다고 들었다. 


  나는 방학이 되면 늘 그 절에 가서 살았다. 지금은 그 일대가 개발되어 큰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절인데 그 때는 첩첩산중에 절이 있었다. 공양주 할머니가 담근 산초장아찌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뜨거운 쌀밥에 그 짜디짠 산초장아찌 한 알을 얹어 먹으면 밥이 저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작은 열매 안의 고소한 기름 맛을 식별해낸 것이다. 아무런 젓갈도 들어가지 않은, 소금으로만 담근 김치도 소금 속의 단맛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정갈한 맛과 비구니스님들이 입는 회색 가사장삼이 나는 언제나 그립다. 평생 회색이나 검정색의 옷을 입어라 해도 싫증 안낼 자신이 있다. 세상사 의식주가 너무 번거롭고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현각 스님이 쓴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만행(萬行) 책을 보며 또 한 번 비구니가 되고 싶은 욕망이 속에서 생생하게 똬리를 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책도 아마 마흔 즈음에 읽은 것 같다. 밑줄을 쳐가며 밤새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떨림을 억누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현각 스님은 숭산 스님의 ‘Who are you?’라는 한 마디에 모든 세속의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한국으로 와 스님이 되었다.


  그 책을 읽으며 잠시 눈을 감고 울음을 삭힌 기억이 난다. 무량스님 때문이었다. 예일대를 나온 무량 스님은 혼자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절을 짓고 있었다. LA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쯤 달리면 닿는 곳이었다. 무량스님은 어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그 일로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 역시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를 했다. 유복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출가하여 홀로 사막에서 한국 사찰을 짓고 있었다. 


  그 책에는 무량스님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 얼굴이 그리스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깊은 눈빛은 이 우주와 맞선 하나의 생명체인 동시에 어떤 운명도 받아들이겠다는 고요한 순교자의 눈빛이었다. 의연함이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미흡했다. 


  나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으로 날아가 말없이 무량스님을 도와주고 싶었다. 누더기 승복 한 벌로 쉼 없는 노동을 수행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일을 하는 모습은, 세상에 불평불만이 많은 나를 숙연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몇 년 후 그가 ‘태고사’라는 절을 혼자 완공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신(神)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전생의 습(習)일까. 전생의 채무(債務)일까. 우문(愚問)인거 안다. 

  - 생각할 때 생각할 뿐, 들을 때 들을 뿐, 볼 때 볼 뿐, 먹을 때 먹을 뿐, 그게 다입니다. 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닐 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따지지 마세요.

  숭산 스님의 말씀이다. 


  숭산 스님 말씀처럼 쉽다면 누군들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3초마다 찾아오는 번뇌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인연을 무 자르듯이 툭, 자를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길을 나서고 싶다. 얼마 전 조계종에서 ‘은퇴 후 출가 제도’를 만들겠다는 소식이 있었다. 어쩌면 최인호 선생도 못 해 본 출가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마흔이 넘어 대학원 공부를 했다. 그 당시 남편의 중국 사업이 부도가 나서 강남에서 성남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미술대학을 나온 나는 문예창작학과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그 때 안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앞날이 캄캄할 때였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대학원을 갈 생각도 하기 전에 부처님 꿈을 꾸었다. 누군가 나를 뒤에서 안고 높은 바위산에 올려주었는데, 눈앞의 기암절벽이 거대한 푸른 부처님 얼굴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앉은 바위산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 바위산 역시 부처님 얼굴이었다. 생생한 꿈은 평생 잊혀 지지 않는 법이다. 그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국대 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합격(기성작가들에게 총장 장학금을 주었다. 물론 한 과목 빼고 모두 올A+을 받았지만)했다. 입학식 날 ‘찬불가’를 듣는 순간 그 꿈이 생각났다. 그 꿈이 내가 불교재단인 동국대학교에 들어갈 꿈이었던 것이다. 


  집이 성남이었으므로 차를 가지고 다녔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한남대교를 지나 국립극장과 장충단 공원과 신라호텔이 있는 장충단로를 따라 동국대학교를 오갔다. 그 때 나는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곡을 듣고 있었다. 해거름의 연둣빛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잎을 뒤집으며 반짝였다. 그런데 한남동을 지나 장충단로를 접어들면서 한순간 첼로 소리가 아득하니 물러나고, 눈앞의 풍경이 확대되었다. 나는 속도를 줄였다. 시공간이 다른 거대한 스크린 속으로 진입하는 것 같았다. 그건 장충단로의 가로수를 따라 양옆으로 내걸린 연등 때문이었다. 사월초파일이 가까워 오면 거리에 연등이 내 걸린다. 연등이 내 걸린 해거름의 거리 풍경은 언젠가 꼭 그런 풍경 속에 서 있었던 데자뷔(deja vu)와 함께 와락 사무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북오도청에서 사모바위 쪽으로 올라가는 북한산 산길에도 사월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연등이 내 걸렸다. 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그 길은 등산객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다. 연등이 내 걸린 그 적막한 산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을 때도, 분명 그 길을 하염없이 걸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을 때면 한 순간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듯 했다. 아, 나는 아직도 비구니가 되고 싶다.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 섬에 있는 묘비명이다. 소설가이면서 이미 ‘한 소식’하고 떠난 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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