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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노자에게 가는 길

책은 물론 읽어야하지만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이럴 때마다 머리가 텅 빈듯하다. 오피스텔에도 없고 집에도 없다. 누가 들으면 거대한 서고(書庫)라도 보유한 줄 알겠다. 찾고 있는 책은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이다. 몇 년 전 EBS ‘인문학 특강’에서 강연한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 공자가 말한 학습하는 삶, 따라하는 삶, 모방하는 삶을 살지 말고, 너 자신에게로 돌아가 삶의 주인으로서 창조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게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향유하는 선진국형의 삶이다. 다수의 무리 속에서 안락을 누리려는 사회는 영원히 일류가 될 수 없다. 집단에 종속되지 말고, 집단을 이겨내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기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개별적인 삶을 살 때만이 ‘생각하는 힘’, 통찰이 생긴다.  

  몸과 말과 표정에서 에너지가 발광체처럼 뿜어져 나오던 최진석 교수의 강의는 국보급이었다. 인문학 류의 책은 주로 읽을 때만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는 책을 놓는 순간 바로 잊어버리고 타성에 젖은 채로 산다. 노자를 다시 찾아보고 싶어진 건 순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사람 간 거리 두기와 자가 격리가 몇 달간 지속되자 상담예약이 없는 날은 아예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다가, 애견과 길 건너 경안천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그 사이 국회의원 선거(2020.4.15)까지 있었다. 그 아사리판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으려고 멀뚱멀뚱 뉴스를 보는데도 머릿속은 헝클어질 때로 헝클어졌다. 이렇게 머릿속이 속세의 일로 복잡하면 글을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빨리 머릿속을 헹구어내야 한다. 경안천을 다녀와야 한다.

  경안천은 용인시에서 발원하여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 앞을 지나 한강본류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말하자면 북쪽으로 흐른다. 매산리로 이사 온 지 6개월 쯤 된다. 지난번 아파트는 1.500세대였고, 지금 아파트는 650세대다. 주민이 딱 반 쯤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아파트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봄이 되자 아파트는 꽃 대궐로 바뀌었다.

  봄눈 속에서 매화가 앙칼진 꽃망울을 터트리자, 목련이 마치 자신이 봄꽃의 선구자인양 새침한 자태로 먼저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이어 벚꽃이 큰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그러다 백척간두에서 꽃을 피운 자신을 탐하는 바람의 허리를 안고 가열(苛烈)하게 낙하했다. 한동안 꽃비가 내리고 바닥에는 꽃비가 눈처럼 쌓였다. 라일락이 뒤늦게 천지를 진동시키는 향내 나는 나팔을 불며 나타났다.

  그 사이사이 엉겅퀴가 내 키만큼 자라있고, 돌 틈 사이사이 민들레가 노랑 색종이를 뿌려둔 듯 반짝인다. 갈색으로 말라있던 잔디밭은 눈 가는 곳마다 짙은 분홍색 융단을 깔아 둔 듯 꽃 잔디가 모두 접수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무릇 인간에게만 해당되었다.

  자연은 인간이 없어도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5월 5일. 아파트 뜰에는 모란과 철쭉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흰 철쭉 사이에 핀 붉은 모란의 농염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한 때는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줄줄 외우고 다녔는데, 이제는 중간 부분만 기억이 난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는 시다.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지막 문장이 생각났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단어에 꽂혀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찬란한 슬픔’은 봄꽃만의 특권이다. 봄꽃은 잎을 만나기도 전에 소멸한다.

  아파트 앞 토끼 굴을 지나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물 냄새가 나면서 강바람이 양볼의 솜털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하천 주위로 건물들이 없다. 확 터인 공간이다. 심호흡을 한다.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고 오리가 쌍으로 노닌다. 하천의 물은 제법 풍성하다. 내 장딴지만한 잉어가 수면 위로 반 쯤 모습을 드러내며 몸을 뒤채는 걸 가끔 보기도 한다. 다리 밑 수심이 얕은 곳에는 잿빛 왜가리가 하얀 새끼 왜가리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철새는 날벌레를 잡아먹고, 한가로워 보이는 오리 또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작은 물고기는 더 작은 물고기를, 더더 작은 물고기는 플랑크톤을 먹고 살 것이다. 길고양이도 새끼를 치고 살고, 풀숲에는 뱀도 산다. 모든 동식물이 자연에 순응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부귀를 누리거나 빈천하게 살거나, 모두 인연에 따른 자연의 이치이거늘, 늘 평상심을 잃어버리고 불안 해 한다. 불안은 과욕에서 온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를 생각하며 분해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 해 한다.

  인연과보(因緣果報). 선을 쌓으면 복을 얻고, 악을 쌓으면 화를 입는다. 원인과 결과의 이치가 순환 될 뿐이다. 정해진 법칙은 없다. 머리로 아는 걸 행(行)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부처가 될 것이다.

  한 시간 쯤 천변을 따라 흐르는 물을 보고 오면 마음이 맑고 고요해진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으니, 아무도 그와 다투지 못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물은 도에 가깝다. 도는 없는 곳이 없고, 물은 이롭지 않은 곳이 없다. 모두가 원치 않는 곳에 머무른다. 물은 겸손의 덕이 있다.’  

  별안간 잊고 있던 노자를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처럼 일었다. 몇 년 전 교육방송에서 최진석 교수의 노자사상을 들을 때 가슴에서 앎의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던 기억도 새로웠다. 한동안 노자와 놀았었다.

  그 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책을 찾았지만 없었다. 필시 누군가 잠깐 빌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 말고 내게서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빌려준 책을 한 번도 돌려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돌려받지 못한 책 중에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릿한 것은 J.G. 프레이즈의 ‘황금가지’와 ‘체 게바라 평전’이다. ‘누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지 기억나는 게 더 싫다. 아예 ‘누가’ 빌려갔는지 기억나지 않으면 잠시 투덜거리다 말텐데 말이다.  이제는 누군가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줄만한 책이면 아예 주든지 아니면 ‘책은 사서 보는 거’라고 거절한다. 찾던 책은 못 찾고 오래된 다이어리에서 노자의 말씀을 옮겨 적어둔 걸 발견했다.

  ‘사람은 천지간에 태어나 천지와 하나이다. 천지는 자연의 만물이요, 인생 또한 자연만물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에 맡기면 본성에 흔들림이 없지만, 자연에 맡기지 않으면 종일 분주하니, 본성이 속박 당한다. 의식주를 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지 욕심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부와 명성을 탐하면 마음이 초조해지고 번뇌가 늘어난다. 이윽고 죽음이라는 재앙까지 불러들인다. 도의 이치는 매우 간단하다. 욕심을 버리고 본성으로 돌아가는 거다. 천하의 화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천지만물과 모든 생명은 반복해서 태어나고 자라는데, 모두가 음양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람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과 이별과 만남을 겪는다. 이는 인간 세상 온갖 고통의 근원이다. 희비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을 집중하면, 반드시 해결책이 있고 세상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 마음이 맑고 정신이 밝아지면, 속세 밖으로 초월할 수도 있고, 속세 안으로 융합할 수도 있다.’

  오늘은 2020년 5월 12일이다. 잠시 주춤하던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94명이나 추가 되었다. 모두 이태원 클럽 방문자들이다. 뉴스를 볼 때마다 세상 걱정으로 마음이 혼탁해진다. 세상 걱정도 욕심인가.

  예수가 있기 전에 부처가 있었고, 부처가 있기 전에 공자가 있었고, 공자가 있기 전에 노자가 있었다. 저 위대한 성현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한, 선(善)함을 행하라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류의 멸종을 알리는 징후 같아 두려운 눈으로 뉴스를 본다. 신(神)이 노자와 공자와 부처와 예수를 보내줘도 듣지 아니하니,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보내 ‘인류 멸종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일까. 또 다른 노아의 방주가 필요한가.

  ‘책은 물론 읽어야하지만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아무리 학식이 높다한들 천지만물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그것도 욕심이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책 찾는 것을 중단하고 ‘노자’에게로 향한다. 경안천 가는 길이 내게는 ‘노자에게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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