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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붓다의 길

아아, 붓다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붓다(buddha),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계급의 차별 없이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욕망 때문에 생기는 삶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수행을 멈추지 말아야한다고 가르쳤다. 

  가톨릭 집안이라 종교의 선택권이 내겐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고 고등학교도 가톨릭 재단 여고를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가톨릭 학생회에서 서클활동을 했고, 결혼식은 성당에서 했다. 시부모님들은 우리 부모님 보다 더 성당 귀신이었다. 모든 삶이 성당을 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책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 귀착지는 언제나 불교서적이었다. 불교 교리책은 아니었다. 그저 이것저것 스님들이 쓰신 책들을 읽다보면 마음의 평정심을 조금 되찾고는 했다. 그러면서 내가 워커홀릭(workholic)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뭐, 특출나게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들과 어울려 놀 줄을 몰랐다. 사람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있을 때면 문득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빨리 내 책상 앞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해외여행도 2박 3일이 딱 좋다. 3박 4일까지는 견디는데 그 이상 넘어가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모든 풍경이 시들하게 느껴진다. 이게 병이란 걸 아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걸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완전히 극복한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을 되도록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란 걸 안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독립불구(獨立不灈),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으면 된다. 물론 몇 명의 베스트 프렌드와 가족과 나와 상담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동창회도 나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속세를 떠났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되는 데는 반드시 스승이 있는 법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친구라고 생각한 여인들의 배신이었다. 그들은 배신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면 배신이다. 배신이란 단어가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배신이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림을 말한다.

  인간은 자신들과 조금만 달라도 무리에서 배척하려는 못된 습성이 있는듯하다. 잠시 방심하여 무리 속에 발을 담가보려던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담’ 위로 올라섰다. 담 위의 고양이가 왜 기품이 있는지 이젠 안다. 그들이 스승이다. 나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는데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게 한 스승 말이다. 어쩜 그들과는 다른 언어를 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음먹은 지 3년 째 접어들고 있다. 고요한 마음이 좋다. 매일매일 평정심을 유지하니 얼마나 몸과 마음이 청정한지 모른다. 그 동안 매일 성당에 가서 초 하나를 봉헌하고 기도를 한 후, 차에 시동을 걸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하느님에게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서는 모든 게 무지와 욕심에서 비롯되는 걸 알아차리고, 마음을 비우고, 참회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시나브로 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가톨릭계 부디스트(Buddhist)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 생기니 사람들에게 상담도 더 잘해줄 수가 있고, 배신이라 여겼던 여인들에 대한 서운함은 우정과 질투를 혼돈하는 이들에게 ‘고품격 우정’을 원했던 내 탓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것’, 이 평범한 진리를 가톨릭계 부디스트는 기쁜 마음으로 깨달았다.

  세속에 사는 범부중생들이 궁금해 하는 건 딱 네 가지다. 돈과 사랑과 건강과 자식이다. 부처님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그 이치를 알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누군들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머리로 백만 번 알아도 3초마다 번뇌가 일어나는 게 범부중생 아니든가. 

  사주팔자(四柱八字). 생년월일시, 네 기둥을 하늘땅으로 나누면 여덟 글자가 된다. 네 기둥의 여덟 글자. 이를 사주팔자라 한다. 역학(易學)은 주역의 괘를 해석하여 음양 변화의 원리와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상형문자인 한문(漢文)의 역사와 같이 한다. 5.500년 동안 계속 움직이고 있는 학문이며, 빅 데이터이며 통계학이다. 그러니 100% 맞을 확률은 없다. 승률 80%는 된다. 네 기둥 여덟 글자로 만들 수 있는 사주는 514.800개다. 세속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주는 2%가 안 된다.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자신이 그 2% 안에 속하는지. 하느님과 부처님을 아무리 믿어도 이 궁금함을 억누르기 힘드니, 인간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눈물겨운가.

  하느님과 부처님과 공자님이 아무리 목청 높여 말씀을 하셔도 범부중생은 내일이 궁금하다. 모두 다 깨달아 버린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먹고 사나?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그만 각설하고, 이렇게 늙은 잉어처럼 여여(如如)하게 살고 있는 요즈음, 오랜 고객이기도 한 어느 여인이 늙은 잉어의 수염을 건드리는 일이 있었다. 얘기하자면 긴데 최대한 짧게 정리하겠다.

  십여 년 전, 삼십 세 초반에 얼굴을 한 두 번 본 여자다. 이제 사십 세 중반 쯤 되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 낳고, 홍콩에서 산다. 일 년에 딱 한번 상담료를 내고 신수를 보고는 일 년 열두 달 전화를 해서 한 두 시간씩 나를 괴롭혔다. 처음엔 외국에서 얼마나 외롭겠나 싶어, 온갖 쓰레기 같은 시시콜콜한 고민까지 다 받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십여 년 동안, 전화를 할 때마다 내가 기분이 상하는 걸 계속 참아야 했다. 바쁘니까 한 시간 후에 전화를 하겠다고 하면 그 시간에 전화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나를 자기 시간에 맞추려 들었다. 그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돈 있는 티는 또 얼마나 내는지.  한번은 뭘 쩝쩝 먹으며 전화를 받기도 했다. 가끔 그녀의 전화를 안 받기도 했다. 그러면 간격을 두고 계속 전화가 왔다.

  나를 애타게 찾는 고객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다. 몸값에 따라 고액의 상담료를 받기도 하고, 무료 상담을 하기도 한다. 하여, 봉사하는 마음으로 또 전화를 받고는 했다. 그럴 때면 늘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했다거나, 자기가 하는 공방 이름을 지어야 된다는 미끼를 은근히 던졌다. 그러면 나는 그 영악함을 모르는 척 열심히 상담을 해 준다. 결국 나중에는 좀 생각해 보고 작명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하고 끊는다. 십여 년을 이 어린 여자에게 농락당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도 상담으로 바쁜 시간에 전화를 했다. 

  - 선생님, 베트남에 공방 하나를 더 차리려고 하는데요. 

  - 지금 상담 중인데요. 이따가... 

  - 공방 이름도 지을까 해서요. 

  - 3시에 전화 할게요.

  오전 11시부터 두 가족 8명을 상담하느라, 점심도 못 먹은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시 십분 전이었다. 얼른 시장기를 떼우고는 홍콩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시끄러운 마트에서 전화를 받았다. 3시에 전화를 한다고 하면 한국 시간으로 3시인 거지. 전화 받을 태도가 안 돼 있었다. 그녀는 미안하다며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한국 마트나 홍콩 마트나 마이크로 호객하는 건 똑같아, 여전히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화가 나는 걸 참으며 얼른 요점을 말하라고 했다.

  베트남에 공방을 하나 더 차리려고 하는데, 한국 도자기 작가들의 디자인을 살짝 바꿔서, 베트남은 인건비도 싸니까 그곳에서 구워서 팔려고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임계점이 왔다. 나는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되물었다. 왜 작가들의 디자인을 살짝 바꾸려하느냐, 그건 도독질이다. 나도 디자이너다. 왜 그 딴 짓을 하려하느냐고 말했다. 물론 불같은 성질 절대 안 바뀌었다. 그 사이사이 마트의 호객 소리가 화를 더 부추겼다. 올바른 생각인지 선생님에게 물어보려고 했다고? 그런 건 유치원에서 배우는 거다. 나중에 전화하자고 끊었다. 머리 깎은 지 2년 반 만에 파계했다. 여여하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어지럽혀진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평소 무례한 사람을 싫어한다. 그 사소한 경계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다니. 수행이란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아니라 돈오점수(頓悟漸修)임을 알아차린다. 돈오점수란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다.

  아아, 붓다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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