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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욕망의 거리두기

모든 재물과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음을 눈치챘는지 모른다

  디스턴스(distance). 거리, 거리두기. 늘 이걸 못해 평생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것 같다. 거리두기에는 공간적 거리두기와 심리적 거리두기가 있다. 시간적 거리두기도 있겠지만 시간적 거리두기는 별반 어렵지 않다. 눈만 깜박거리고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서 저절로 거리두기가 가능하다.

  공간적 거리두기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시절, 공간적 거리두기는 필수였다. 그러나 내가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거리두기는 심리적 거리두기(between distance)를 말한다. 나는 왜 늘 이 심리적 거리두기를 못해 상처투성이가 되는지.

  현대인은 이 심리적 거리두기를 너무나 잘한다. 대도시에 살며 고학력일수록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긴다. 개인주의를 세련된 지식인인 줄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허상에 갇혀 서로 교감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을 얘기 할 줄도 모르고, 남의 마음을 들을 줄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 외롭다. 외로움은 교감의 부제에서 온다. 교감을 하는 걸 배운 적도 없고 훈련한 적은 더더욱 없다.

  교감의 재료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다. 그 관심과 연민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우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현대인은 우정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우정이란 지음(知音)을 말한다. 지음, 자기의 소리를 알아듣는, 다시 말해 속마음을 알아주는 벗을 말한다. 속마음을 알아주기만 해서도 안 된다. 변하지 않는 마음, 의리까지 이어져야 진정한 우정이다. 

  벗을 알면 벗의 근심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근심을 절대 보지 않는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에 대한 궁금함이나 호기심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친구는 다만 경쟁상대일 뿐이다.  

  관심은 오직 겉에 들어난 조건들에만 있다. 청소년기에는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20대 때는 외모가 예쁜지 준수한지, 30대 때는 배우자가 무엇을 하는지, 40대 때는 어느 동네에 살며 몇 평에 사는지, 50대 때는 자식들이 명문대를 갔는지 혹은 자식이 얼마나 능력 있고 물질이 풍부한 배우자와 결혼했는지, 60대 때는 부모 혹은 시부모가 유산을 물려주고 빨리 죽었는지 등등이다. 유산도 없으면서 아파 요양병원에 있다면, 유산 많이 남겨두고 일찍 죽은 시부모를 가진 친구는 자신이 복이 많은 걸 확인하고 살짝 교만해진다.

  - A 시어머니 요양병원에 가셨다고 하더라. 어떡하니? A 너무 힘들겠다. 유산도 하나도 없고 아들 둘은 결혼도 안했는데, 남편은 퇴직했잖아.

  - 그러게 말이야. 넌 정말 복이 많다. 시부모님이 그 많은 땅 물려주고 일찍 돌아가 주셨는데다, 딸이 그렇게 연봉이 많은 IT회사에 다녀서. 네 부부가 손녀 돌봐주는데 오백만원씩 준다며? 

  - 에이, 이백은 도우미 이모에게 가지. 어쨌든 난 내가 이렇게 복이 많은지 몰랐어. 

  A를 뺀 그들은 별안간 엄청 선량해진 목소리로 조금 불우하게 된 친구를 위로하는 척 자신들의 안위를 확인한다. 그들 중 누구도 진심으로 A를 걱정해 주는 이는 없다. 그래도 그들은 동창이라는 카테고리를 절대 풀지 않고 친구라고 굳게 믿는다. 온종일 수다를 떨다 집에 와도 그들은 외롭다. 근데 왜 외로운지 모른다. 

  그 모든 부와 외형과 조건들이 다 헛된 것임을 몸과 마음은 안다. 머리만 모른다. 또한 자신이 외롭다고 생각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얼른 욕망을 쫒아 무엇인가를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강물에 뛰어든다. 외로워보지 않고 어찌 남의 외로움을 알 것이며, 마음이 아파보지 않고 어찌 남의 아픔을 알 것이며, 배가 고파보지 않고 남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는가. 하여, 그들은 아무도 사랑 할 수 없는 목각인형 마리오네트가 되어 간다.

  서로 교감하려면 진솔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진솔하게 말하지 않는다. 할 줄을 모른다. 진솔하게 말하는 훈련은 독서를 통해 자존감이 높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입시경쟁에 내동댕이쳐진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이번 생은 망’하라고 하는 말이냐고 할 것이다. 

  외로운 그들은 만나고 또 만나야 한다. 코로나 시절, 공간적 거리두기는 매우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맛집 찾아가서 먹고, 쇼핑하고, 차 마시고 혹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진종일 허언(虛言)을 떠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한 때 나도 그들 속에 섞여 있었다. 다 내 맘 같은 줄 알고 내 속을 다 내보였다. 포장되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겹겹이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때 쯤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나를 우리(we)에 가두려 했고, 그들의 가치 기준에 맞는 인간으로 길들이려 했다. 그들의 가치 기준은 오로지 물질과 화폐와 자본으로 재빨리 계산되고 환원되는 거였다. 그 기준이라면 가난한 예술가는 모두 하류인생이다.

  거의 모든 걸 가진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가장했지만 습기처럼 묻어나는 자기기만은 숨길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이 모든 재물과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음을 눈치 챘는지 모른다. 그걸 눈치 챘지만,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다. 다른 이도 그런가 하고 소금물을 들이키듯 정탐하려, 만나고 또 만난다. 정신적인 긍지가 없으면 인간은 영원히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공간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게 아니라 ‘욕망의 거리두기(distance of desire)'가 필요하다. 욕망의 거리두기를 함과 동시에 ‘심리적 거리두기’는 좁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타인이 보이기 시작하고, 타인의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타인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욕망은 소유욕에서 출발하고 그 소유욕은 오로지 내 새끼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가족주의로 변질되면서 극도의 이기주의로 만든다. 현대인은 심리적 거리두기를 하는 게 교양 있는 것이라 여기니, 남의 슬픔이나 고통이나 아픔 따위는 언제나 강 건너 남의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긍지는 어떻게 생길까. 인간은 결국 이타적(利他的)일 때 긍지를 가지게 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남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도울 때 말이다. 그런 행위는 한 생명체를 살리는 일이고, 나아가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한 생명체를 살리는 활인공덕(活人功德)이야말로 바로 나를 살리는 최고의 공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거대한 인연의 그물인 ‘인드라의 진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연의 법칙을 생각하면 답은 나온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 우리의 삶 또한 사계절이 있다. 가을이 왔는데도 단풍이 들지 않는다면 이상기후로 인류는 멸종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허무를 아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지 모른다. 그 허무를 아는 과정이 고난의 연속이었고, 마침내 그 허무와 맞닥뜨렸을 때는, 욕망을 들어내는 마지막 힘든 여정이 남아 있다. 깨달은 자란 이미 허무를 아는, 순환되는 우주의 원리를 아는, 죽음이 또 다른 시작임을 아는, 하여,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아닐까. 

  아무튼, 심리적 거리두기는 좁히고, 욕망의 거리두기는 넓게 벌릴수록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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