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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정영희의 판도라]굿바이, 아미르!

여행은 다시 돌아오는 데 핵심이 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이섬에 7.5의 강진과 대형 쓰나미(2018년 9월 28일)로 인해  1400(10월 4일)여명이 숨지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새벽 2시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새벽 5시에 깨어나 조간신문을 보다, 나는 10만원을 대한 적십자사 계좌로 송금했다. 인도네시아 돈으로 134만 루피아 정도 된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나의 가난이 싫다. 이럴 때마다 최소한 백만 원씩 척척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다른 나라에 재난이 닥쳤을 때 성금을 보내긴 처음이다. 가끔 성당 신축 기금마련에 성금을 보내거나, 야심한 밤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려운 이웃의 사연을 보며 전화 ARS로 소액의 성금을 보내는 게 나의 적선의 한계였다. 또 있기는 하다. 물건 값을 깎지 않는다거나 술집이나 음식점에 망개떡이나 껌을 팔러오는 사람에게 반드시 팔아주거나, 스님이 오면 꼭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 애쓴다. 그저 모든 서민이 할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성금을 보낸 건 ‘아미르’라는 키 작은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았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가 그립다거나, 기억에 남는 건 그곳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미르는 인도네시아 바탐섬을 여행했을 때 우리 일행의 가이드였다. 그는 한국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고 한글을 쓸 줄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한국어로 고급한 농담까지 할 줄 알았다. 

  바탐섬이 고향이고 대학 때는 데모를 하다가 무료호텔(감방)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42세. 아이가 셋인 그는 키가 작아(160센티) 군에도 못 갔다고 한다. 165센티미터는 돼야 군에 갈 수 있다고. 몸무게는 40킬로나 나갈까 싶게 왜소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선량했고, 정직했고, 검은 별처럼 반짝였고, 아낌없이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웃음소리가 맑았다.

  한글을 볼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면서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는지. 외국어를 잘 한다는 건 그 나라의 문화적 정서를 안다는 말이다. 한국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는 아미르는 우리나라의 술집 문화인 1차, 2차부터 노래방까지 다 꿰고 있었다. 한국말을 배운 지 5년 됐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50여분 페리호를 타고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도착할 때 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저녁노을은 장엄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을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며 수평선(인도양) 너머로 지는 해를 보았다. 적도부근의 나라. 우리나라보다 두 시간이 느린 나라. 수교 45주년인 나라. 1만6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인구 2억 6천만 명, 세계4위인 나라. GDP(국내총생산)가 1조749억 달러인 나라(세계 16위). 우리나라 GDP는 1조 6천억 달러, 세계 12위다. 

  왜 해가 지는 모습은 늘 우리를 침묵하게하고 숙연하게 만드는 걸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시간과의 이별 때문일까. 이별의 마지막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름다움은 공기처럼 스며들어 우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눈물을 퍼 올린다. 눈물은 인간을 정화시키는 기능이 있다. 가끔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작품이나 영화를 볼 때, 혹은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다 느닷없는 어느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실컷 울고 나면 별안간 배가 고파지면서 밥이 먹고 싶어진다. 우울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눈물은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명약이다. 사람은 가끔 울어야 오래 산다. 

  장엄한 노을을 바라보며, 울컥울컥 눈물을 토해내며 내린 인도네시아 바탐섬. 그러나 싱가포르에서의 그 깨끗하던 거리와 공기는 간데없고, 지저분한 주차장과 매연과 소음이 펼쳐졌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4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 아, 이 기시감은 뭐지? 

  차창으로 보이는 거리는 십 여 년 전 베트남 호치민에 갔을 때 모습과 흡사했다. 특히 오토바이 행렬이 끝도 없는 게 그랬다. 오토바이를 모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어김없이 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슬람교도가 많은 그들은 어린 여자아이도 히잡을 쓰고 있었다. 약간 겁먹은 듯한 그들의 눈은 선했다. 어느 순간 서울은 어린아이를 보기 힘든 도시로 변해 가는데 비해 그곳은 엄마 아빠 사이에 반드시 아이가 끼여 앉아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인도네시아로 입국할 때는 ‘사바사바’가 통해 우리 일행은 선착장의 입국심사대의 긴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다른 게이트로 통과했다. 그러나 싱가포르로 입국할 때는 편법이 통하지 않아 한 시간 가까이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직도 그만큼 인도네시아는 어두운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싱가포르는 얼마 전 서거한 리콴유 총리가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비리를 강력히 처벌하는 정책을 편 덕에 금융과 물류의 청렴한 도시국가가 되었다.

  다음 날 원주민 마을에 갈 때였다. 아미르는 절대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돈을 주면 아이들은 그 다음 날부터 학교를 가지 않고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민다고 했다. 그럼 그들의 앞날을 망치게 되니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연필이나 볼펜은 줘도 된다고 했다. 연필이나 볼펜은 귀하기 때문에 그 필기도구를 가지고 공부하는 걸 자랑스러워해서 공부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할 때 아미르는 매우 진지했다.

  - 이곳은 원주민들의 오페라하우스. 한국으로 치면 예술의 전당 또는 세종문화회관입니다. 

  그는 마치 서울에서 한 삼십 년은 살은 듯이 말했다. 야자나무로 가득한 원주민 마을에 전국노래자랑의 가설무대보다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붕은 야자수 잎으로 덮여 있다. 우리는 전통무용을 감상하기 위해 긴 의자에 앉았다. 음악이 흐르고 스무 살 안팎의  앳되고 예쁜 아가씨들이 나와 전통춤을 추었다. 

  그 무대 옆 바깥쪽 땡볕에는 대 여섯 살 쯤 된 원주민 계집아이들이 무대 위의 언니들이 하는 춤 동작을 보며 따라하고 있었다. 그 계집아이들은 자라 또 저렇게 무대 위에서 전통 춤을 출 것이다. 그건 그들의 삶의 형식이다.  나는 무대 위의 춤보다 그 꼬마들의 무용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저는 4개 국어를 합니다.

  아미르는 인도네시아어, 말레시아어, 영어, 한국어를 한다고 했다.

  - 하나의 언어만 더 배우면 정치를 할 것입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 거짓말! 

  이게 무슨 소린가하고 나는 아미르를 쳐다보았다.

  - 거짓말 하나만 더 배우면 정치를 할 겁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유창한 한국말로 저런 유머까지 할 줄 알다니. 너무 능청스럽게 말해 잠시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는 정말 언젠가 인도네시아의 정치인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정치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는데 핵심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돌아갈 수 없으니, 여행이 아니라 영원한 길 위의 나그네거나, 귀양살이거나 혹은 망명객인 셈이다. 여행을 다녀오면 늘 그곳의 풍경과 커피맛과 어느 거리의 음식 맛만을 기억했다. 수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가이드를 기억하긴 처음이다. 그런 그가 있는 인도네시아에 지진과 쓰나미가 덮쳤다. 물론 바탐섬은 아니다. 케이 자처럼 생긴 술라웨시섬이다. 살아생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지만 그의 조국 인도네시아가 불행한 일을 당했다니 마음이 아프다. 외국의 누군가가 내가 사는 한반도의 핵전쟁을 걱정하듯이 말이다.

  아미르, 무탈하시지요? 멀리서나마 재해로 인해 숨진 이들의 명복을 빌며 하루빨리 그대의 조국이 평온하길 빌겠습니다. 부디 그대의 앞날이 창대하길 바랍니다. 굿바이, 아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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