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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거위의 꿈

아, 난 아직도 꿈이 있어요

  - 너도 돈 있어봐라, 안 그렇지.

  가끔 대학동창이 내게 한 이 대사 한마디가 화두처럼 뇌리에 박혀 있다. 난 과연 돈이 많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대학동창 세 명이 비교적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나만 빼고 두 명은 쇼핑을 엄청 좋아했다. 나와 취향이 잘 맞지는 않았지만 딸도 없고 여형제도 없는 나는, 노년을 외롭게 지내지 않으려면 친구를 사귀어놔야 한다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나기만하면 쇼핑하는 얘기를 주로 했다. A의 남편은 대기업 임원이고 B의 남편은 공무원이었다. A와 B는 취향이 비슷해서 눈만 뜨면 백화점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여자들이 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가는 건 맞는다. 또한 조금 더 차려입는 게 조금 덜 차려입는  것 보다 호감과 신뢰감을 주는 것도 맞는다. 그러나 자기 삶의 가치기준은 없고, 늘 남과 비교하며, 늘 남의 눈에 비친 외모만 의식하는 삶이란 너무 궁색하지 않을까. 스스로 명품이 되려고 노력해야지, 명품을 걸친다고 인간이 명품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취향의 문제려니 생각했다. 

  - 아직도 그렇게 사고 싶은 게 많아?

  어느 날 하도 쇼핑하는 이야기를 길게 하길래, 내가 그렇게 한마디 했다.

  - 너도 돈 있어봐라, 안 그렇지.

  B가 내게 한 말이다. 

  난 돈이 없어 쇼핑을 하지 않는가. 아니다. 하고 싶은 게 별반 없기 때문에 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말한 B의 심정이 이해는 된다. B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결혼해서는 남편이 오랜 동안 아프다가 오십 초반에 떠났다. 어쩜 B의 인생에서 지금이 전성기인지도 모른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나온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 여자들은 원하는 걸 하지 못하면 원한이 생깁니다. 원한이 맺히면 구천을 떠돌게 되지요. 그 구천이 어디냐? 백화점입니다. 백화점을 떠돌고, 떠돌고, 떠돕니다. 원한이 풀릴 때까지.

  B는 백화점에서 자신이 사고 싶은 옷이나 신발이 너무 고가(高價)여서 못 사면 외롭고 우울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남편이 떠나고 공무원 연금의 70%를 받고,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딸 둘과 생활했다. 그녀 인생에서 제일 여유로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닌 듯 했다. 

  나는 얼마든지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쇼핑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포유동물은 옥시토신(Oxytocin)이라는 호르몬을 분비 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 ‘일찍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자궁 수축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이 호르몬은 진통을 유발하고 분만을 쉽게 이루어지게 하며 젖의 분비를 촉진시켜 수유를 준비하는 호르몬이다.     

  그러나 이 호르몬은 사랑을 할 때도 분비된다. 연인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사랑이나,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나, 반려동물과의 사랑이나, 동료와의 사랑이나, 박애주의자의 사랑이나, 적선을 할 때의 사랑이나, 봉사를 할 때의 사랑이나,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을 할 때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쾌락과 행복감을 높여준다. 따라서 옥시토신은 불안과 공포와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여자들이 새 옷을 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에 빠질 때도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도 옥시토신이 분비되는 것이다. 우울한 여자들이 쇼핑중독에 빠지기 쉬운 이유다. 

  먹이 걱정 없이 허공의 둥지에 터를 잡고 사는 ‘강남여자’들은 어디에 마음을 걸고 살까. 남편 혹은 자식, 아니면 부동산 투기에 혹은 자신의 얼굴이나 몸에 투자하거나 명품 따위에 혼을 빼앗기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물론 종교 활동이나 봉사 활동에 목숨 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특별히 숭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봉사 좀 한답시고 교만한 마음이 깃들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온통 제 인생을 거는 여자. 남편의 배에 동승했다고 굳게 믿는 여자. 그게 동반자라고 생각하는 여자. 그런 여자에게는 자신의 배는 없다. 그런 여자는 대개 불행하다. 남편을 부속물처럼 여기거나 자신을 종처럼 여긴다. 일심동체란 사악한 미신이다. 동반자란 각자의 배를 타고 같은 강물 위를 벗해서 간다는 말이다. 결혼서약이 노비 문서를 주고받은 걸로 착각한다면 그 부부는 재수 옴 붙은 거다.

  자식에게 온통 제 인생을 거는 여자 또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결혼까지 한 자식을 일일이 간섭하는 바람에 아들은 ‘마마보이’가 되고, 엄마 사주를 받는 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다 산 마녀처럼 남편의 등골을 뺄 생각만 한다. 그런 여자와 결혼했다면 그 남자는 똥 밟은 거다.

  부동산 투기에 혼을 빼고 사는 여자 당연히 불행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소금물을 들이키는 아귀들 같다. 50이 넘으면 얼굴도 그렇게 변해 있다. 탐욕이 볼살에 붙어 사창가의 포주

같다. 죽을 때까지 ‘돈, 돈’ 하다 간다. 많이 벌어놓고 조금 일찍 왔던 곳으로 돌아가 준다면 ‘멋진 년’이 된다.

  자신의 얼굴이나 몸뚱이에 혼을 팔고 사는 여자 엄청 불행하다. 병이다. 천날 만날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아마 백설공주 계모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 성형외과 문턱 다 닳을까 겁난다. 그런 여자들은 ‘자존’이라는 단어를 모른다. 스스로의 존엄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명품에 혼을 빼고 사는 여자 역시 불쌍하다. 심하지 않으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는데 심하면 이것도 병이다. 인생의 주객이 전도되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기’라는 걸 모른다. 그녀의 주인은 명품이다. 명품을 쫒아가는 하녀로 평생 살다 죽는다.

  늘 남편 자랑과 자식 자랑, 주변의 번지르르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입에 올리며, 조용조용 ‘엘레강스’하게 말하는 여자들을 보면 전혀 아픔이 없어 보인다. 그녀들은 혼자 있을 때 잠시 쓸쓸하거나 외롭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마치 불행이라도 만난 듯 화들짝 놀라 그런 생각을 떨쳐낸다. 그녀들은 존재를 응시할 틈도 없이 모르핀을 맞듯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난 복 많은 여자라고. 그녀들은 쓸쓸하거나 외롭다고 생각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인간이 외로워 보지 않고 어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아픔이 없는 듯이 구는 위선적인 여자는 누군가의 끈에 놀아나는 목각인형 ‘마리오네트’ 같다. 아픔이란 인간의 향기와 같다. 인간의 향기가 없는 사람은 그립지도 않고,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다.

  -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거리에서 외치고 다니는 여인을 보면 부럽다. 어딘가에 미칠 수 있다는 건 분명 은총이다. 나는 종교 활동에도, 봉사활동에도,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외모에도, 명품에도 마음을 걸지 못했다. 오직 명작을 쓰고 싶은 욕심과 책을 출간할 때마다 유명해지지 않아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했다. 얼마나 이기적인 욕망인가. 허나, 이 나이가 되니 그 또한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은 행복하다. 모든 여자들은 나름대로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선택을 행(行)하고 있을 때만큼은 옥시토신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

  다시 돌아가자. 난 정말 돈이 많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싶은 건 별로 없다. 돌아보면 내 또래 사람들의 평균치 이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내겐 ‘나누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오래 전 이태석 신부(1962~2010)의 이야기,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제로 아프리카 수단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원주민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의료 활동을 하는 어느 여의사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속절없는 울음이 터져 오래도록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숭고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난 그동안 나만 위한 삶을 살면서도 늘 더 풍요롭기를 원했다니. 부끄럽고 부끄러워 눈물이 난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의사가 되어 아픈 이를 돕고 싶고, 내게 돈이 많아진다면 아프리카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고 싶다. 이런 희망 사항은 초등학교 ‘장래희망’ 칸에 적는 것 아닌가. 아, 난 아직도 꿈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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