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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당신 생애도 그토록 뜨거운 눈빛으로 그대를 바라보는 이가 있기를

  언제부턴가 책보다 영화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면서부터 이겠지만, 책읽기는 고독의 시간과 마주해야한다. 영화도 늘 혼자 보지만 책읽기처럼 고독을 마주해야하는 시간은 아닌 것 같다. 그 속에는 배우가 있고,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고, 빛이 있고, 움직임이 있다. 하여, 영상은 현재진행형이면서 미래 산업인 셈이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피터 웨버 감독(2003년)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에 개봉했다. 물론 나는 집에서 봤다. 조금만 참으면 곧바로 집에서 유료로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 없었다면 이 영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번역 되어 나온 책의 제목은 ‘진주 귀고리 소녀’이다. 미국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1999년도에 발표한 소설이다.

  당연 책을 샀다.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클립을 보면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음을 안다.  그때부터 나는 이책을 보다 저책을 보곤 하는 버릇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분명 그 책을 보다가 잠시 접어두고 더 말랑하고 달콤한 책을 끼고 노느라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다 곧바로 영화가 만들어져서 결국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보게 되었다. 그 숨 막히는 사랑의 영화를 보며 모든 여자들이 저렇게 뜨겁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서 진주 귀걸이를 선물 받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17세기 네들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다. 터번을 쓴 예쁜 소녀가 왼쪽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는 그림이다. 배경은 완전 검은색이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린다.

  커다란 눈에 약간 벌어진 촉촉하고 도톰한 관능적인 입술, 보일 듯 말 듯 한 신비로운 미소 그리고 진주 귀걸이. 이 이국적인 초상화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매혹이 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도 이 그림 속 소녀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에서 소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빚만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한 화가였다. 네들란드 델프트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스무 살에 부유한 집의 딸과 결혼해서 자녀를 11명 쯤 두었고, 평생 35점의 그림을 남겼으며 마흔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페르메이르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았으므로 슈발리에는 대부분을 상상으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찾아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다들 하던 귀걸이도 귀찮다고 팽개칠 나이에 나는 비로소 귀를 뚫고 진주 귀걸이를 했다.

  - 니는 와 귀걸이는 안 했노?

  5년 전 쯤 친구 따라 간 무당집의 영매가 내게 한 말이다.

  - 귀걸이요? 전 귀걸이 안 해요.

  - 달랑달랑한 귀걸이 하나 해라. 좋은 일 있을끼다... 니는 인물이 차암 좋구나.

  그 영매는 영감신이 들어왔는지 담배를 피우며 내게 말하는 품새나 말투가 능글맞았다.  좋은 일이 생긴다니 귀걸이를 해 볼까 잠시 구미가 당겼지만, 귀를 뚫어야한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늘 거기서 생각은 멈추었다. 그러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봤을 때의 소망이 생각났고, 17세기나 18세기 유럽이 배경인 영화를 보면 귀족 여인들이 하나같이 귀걸이를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귀걸이의 역사는 유구하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권력을 과시하거나 악귀를 쫒는 부적으로 남녀 함께 사용했다. 영국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귀걸이가 크게 유행을 했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 말에서 한대에 걸쳐 이당(珥璫)이라고 불리는 귀걸이가 성행 했고, 우리나라도 오래 전부터 장신구 혹은 부적의 형태로 사용하였다.

  각설하고, 매년 돌아오는 지루한 생일 날, 내가 나에게 선물을 주듯 귀를 뚫었다. 귀를 뚫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별로 아프지 않다. 귀를 뚫는다는 행위가 이렇게 오랜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서성이게 될 줄은 몰랐다. 20대에 귀를 뚫은 사람을 보면 참으로 용감하게 느껴졌다. 달랑달랑 거리는 진주 귀걸이를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다.

  - 귀걸이를 하면 1.5배는 예뻐 보인데요. 선생님도 하세요.

  수없이 들은 말이다. 드디어 했다.

  영화에서는 페르메이르(화가 : 콜린 퍼스 분)가 그리트(하녀 : 스칼렛 요한슨 분)의 귀를 뚫어준다. 그 장면은 어떤 성애(性愛)장면 보다 숨 막힌다. 최초이자 마지막인 ‘귀 뚫어주는 남자’. 영화 제목을 ‘귀 뚫어주는 남자’라고 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영화가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고 발끈할 거는 없다. 영화란 감독이라는 필터링(filtering)을 통해 재해석 될 수 있다. 또한 완성된 영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화가 페르메이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찍 결혼을 해서 처가살이를 한다. 장모가 물어다 주는 일을 하며 바람 한 번 피우지 않고 아이를 줄줄이 낳는 아내와 그림만을 오간다. 그러다 하녀 그리트를 만난다. 페르메이르는 하녀 그리트를 그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콜린 퍼스의 할 말을 삼키는 듯 하는 연기는 압권이다. 그가 왜 그인가를 보여준다.

  콜린 퍼스와 스칼렛 요한슨의 숨을 멈춘 듯한 눈빛과 손짓과 조용한 움직임은 보는 내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전희(前戲)를 보여준다. 특히 현악반주에 플루트 연주가 얹어진 선율은 애절하고 신비로워 한순간 숨을 멎게 한다(알렉산드르 데스플라 작곡).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트의 마음은 페르메이르에게 온통 가 있지만 정작 몸은 푸줏간 집 아들 피터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히스테리가 심한 아내에게 들켜 하녀 그리트는 쫓겨난다.

  그리트가 쫓겨나기 전, 페르메이르의 후원자 라이벤(톰 윌킨슨 분)이 그리트를 그려주길 원한다. 그는 그녀를 그린다. 하녀의 두건을 벗기고 터번을 쓰게 한다.

  - 귀걸이는 왜 안 하지?

  - 하녀는 귀걸이를 하지 않습니다.

  귀걸이는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장신구였다.

  페르메이르는 그리트의 귀를 뚫어주고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걸어 준다. 그리트는 눈물을 흘리고, 뜨겁게 바라만 보던 페르메이르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한번 쓰다듬는 게 다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가난한 화가 페르메이르로서는 하녀의 두건을 벗겨주고, 진주 귀걸이를 걸어 그림 속에서나마 귀족으로 만들어주는 게, 그가 사랑하는 하녀 그리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치였다.

  17세기의 억압된 사랑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시대 때도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사랑의 방식인 것이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랑의 방식이다. 페르메이르처럼 저랬다가는 잘못하면 관음증 환자나 스토커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의 뜨거운 눈빛이 사랑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여인도 요즘 시대에는 드문 일일 것이고.

  아무튼, 당신 생에도 그토록 뜨거운 눈빛으로 그대를 바라보는 남자 혹은 여자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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