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 말어?”
냉장고 깊숙한 구석, 유리 뚜껑 너머로 시퍼렇게 눌린 명이나물김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단지 오래된 반찬 하나를 마주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오래도록 눌려 있던 감정과도 마주하게 되었다.
2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맛본 그 김치의 기억을 좇아 한국산 명이나물로 김치를 담갔던 열정은 이미 식어 있었다. 질기고 억센 식감에 실망한 가족들의 표정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도 닮아 있었다. 아무도 안 먹는 김치, 냉장고 안 자리만 차지하는 골칫거리를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꺼내다가 문득 손길이 멈칫했다.
그 순간부터, 버려진 김치를 살려내려는 고군분투는 곧, 나 자신을 다시 끌어안으려는 여정이 되었다.
명이나물은 한때 울릉도에서나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식재료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고깃집 필수 반찬으로 자리 잡더니, 이제는 시장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산마늘’이라 불리며 잡초처럼 들에 지천으로 자란다는데, 오스트리아에 사는 언니는 그 산마늘로 김치를 담가 먹는다. 그 맛이 얼마나 일품이었는지, 언니네 집에 들렀던 조카들이 그 김치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 그래서 재작년, 한국에 나왔을 때 시장에서 명이나물을 사다가 김치를 담갔다. 우리 집에도, 동생네에도 한 통씩 나눠주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맛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스트리아산 산마늘로 만든 김치는 부드럽고 향긋했는데, 한국산 명이나물은 질기고 억세서 씹는 맛이 거칠었다. 김치를 담근 언니도, 원래의 맛을 아는 나도, 기대에 부풀었던 아이들도 “이건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그 김치는 유리 락앤락에 담긴 채 우리 집 냉장고에서 2년간 벌을 서게 되었다. 대놓고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내심 버려둔 상태. 커튼 친 방구석에서 온종일 게임만 해대는 삼수생 아들이나 죽을 날만 기다리는 뒷방 늙은이를 보는 심정이었다.
어느 날, 드디어 마음을 냈다. 어떻게든 해치우기로. 냉장고 제일 안쪽 구탱이에 처박혔던 김치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짙은 갈색의 잎들이 서로 엉켜 눌려 있었고, 그 사이로 은은한 발효 냄새가 피어올랐다. 물에 헹구고, 다시 헹구고, 물기를 짜내고, 하나하나 펼쳐서 냄비에 차곡차곡 눕혔다. 들기름을 두르고, 파와 마늘을 넣고, 육수를 붓고, 조심스럽게 불을 올렸다. 김치가 끓기 시작하면서 부엌 안에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그 향은 오래된 기억을 데워주는 듯했고, 나는 그 냄새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났다.
한 입 떠서 밥을 싸 먹었다. 질기던 잎은 부드럽게 풀어졌고, 간간한 국물은 밥알을 감싸며 입 안에서 조용히 퍼졌다. 짜지도 달지도 않은 그 맛은, 오히려 슴슴해서 더 깊었다. 열 반찬이 부럽지 않은 단출한 맛.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오래되고 시어 빠진 것도, 제 방식대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그건 단지 음식의 재활용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요즘 나는 늙어가는 나를 자주 마주한다. 거울 속 주름진 얼굴, 예전 같지 않은 체력, 사라져 가는 역할들. 젊고 생생한 아름다움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명이나물김치는 꼭 나 같았다. 다시는 환영받지도, 쓸모가 있지도 않고, 매력도 사라진 50대 끝자락의 아줌마. 그런데 그 버려도 싼 골칫덩이가 이렇게 거듭나다니, 제법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대로도 괜찮구나. 오래되고 시어 빠진 것도 이렇게 나름의 맛을 낼 수 있구나. 아마 나도 그럴지 모른다. 늙고 주름지고 볼품이 없어져도, 살아온 인생의 맛이 있을지도.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아름다움이란 나다움이다.”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았다. 미모나 젊음, 쓸모와 역할이 사라진다 해도 내가 어디 가는 건 아니지. 열심히 살아온 나는 그대로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우리는 완벽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위로한다.”
그 말처럼,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래된 김치처럼, 나도 내 방식대로 익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저 지금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나답게,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그 나다움이야말로, 가장 깊고 진한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