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마법의 시간이다. 뽀로롱 요술봉을 흔들면 어느새 새로운 곳에 와있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상상하면서 나도 체인지를 시도한다. 나의 요술봉은 부엌에서 내 방 책상에 앉기까지 몇 걸음, 이 짧은 거리가 내겐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의 이동. 즉 ‘주부’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로의 이동이다. 그 거리는 너무 짧아서 잠시 세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평행우주'는 의식의 세계에서도 가능하다는 억지이론도 세뇌에 포함.
‘마법의 시간’은 나만의 리츄얼이다. 주부인 나는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재택근무자, 종일 근무에 야근은 기본, 중급 피지컬과 최상급의 멘털은 필수조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잠시라도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린 특단의 조치가 마법의 시간, 주부에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글쓰기, 그림 그리기, 책 읽기, 공부하기등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오후 4시, 운동은 필수. (마치 예체능 홈스쿨링 같은?) 당연히 매일은 불가능하고 일주일에 평균 3번은 찾아 먹어야(?) 심신이 안정된다. 마법의 시간은 내가 나에게 주는 보상이자 일종의 미션이기도 하다. ’ 마법‘이라는 말이 미션의 중압감을 희석시켜 주는 감미료 역할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간단한 과일과 요거트, 아침식사 메뉴는 같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며칠 전 아들은 7개월째 공부 중이던 공인중개사시험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기출문제를 풀어도 점수가 안 나오고 왜 해야 하는지 목적의식도 없으니 남은 이개월도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요컨대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것이 이유다. 그 선언과 함께 그나마 유지되던 평온함도 무너졌다. ‘그나마’라는 것은 사실 간당간당했기 때문이다.
아침 8시면 깨우기 시작해서 수차례 자리를 바꿔가며 조는 것도 모자라 밥 먹으면서도 꾸벅꾸벅. 9시 20분 무표정의 얼굴로 집을 나서기까지 나는 미션(제시간에 아들 학원 보내기) 파스벌을 위한 다양한 감정과 표정의 콜라보네이션을 연출해야 했다. 중, 고등학교 때 싸던 도시락을 20년 만에 다시 싸면서 나름 ‘보람찬~’을 외쳤건만 지금 생각하니 ‘그건 니 생각이세요’다. 합격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들의 성격과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우리(나와 남편)는 정주행만이라도 하기를 바랐지만 그조차 못하겠다니 간당거리던 줄이 기어이 끊어진 셈이다.
줄을 다시 이을수 없을까. 아쉬운 마음도 잠시, 성인이 된 지 십 수년이 지난 아들에게 회유도 충고도 먹힐 리 없다. 강 건너 불구경에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겉으로는 쿨 한 척, 표정관리,불씨조절은 내 몫이다.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아들은 룰루랄라다. 힘든 선언을 하고 난 뒤의 개운함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영화 보러 간다고 전화를 준다. (내가 궁금해할까 봐 말해준다는데.. 그냥 조용히 가세요). 내 표정이 굳어지는 대신 아들 얼굴은 펴졌으니 전세는 역전, 요술봉이 필요한 순간이다.
뽕~ 일단 다른 세계로 이동. 실패한 미션은 다른 미션으로 커버해야 한다. 하지만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오늘 '마법의 시간'은 휴무일인가 보다.
p.s 7개월간의 나의 아침 근무는 이대로 막을 내릴 것인가.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은 미련일까 집착일까. 아마도 둘 다. 미련과 집착은 어차피 이음동의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