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아니 두어 달 전부터 생일에 뭘 해야 하나, 아니 뭘 해줄까를 생각했다. 수식어가 생략된 대부분의 동사가 상반된 의미(긍정과 부정, 즐거움과 괴로움 같은)를 내포하듯 ‘생각했다’ 또한 복합적 감정의 압축이다. 그 감정을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귀찮다’다. 40년간 해 줬으면 됐지, 언제까지 생일상을 차려줘야 해? 삼복더위에 낳느라 고생한 내가 생일상을 받는 게 맞지 않나? 생일의 주체는 난데 축하는 아들이 받는 것의 억울함(?), 첫 문장에 ‘오늘은 아들 생일이다’라고 쓰지 않고 ‘아들을 낳았다’라고 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맘과 생일은 별개의 문제, 생일을 우선해야 한다. 일안으로 가족(독립한 아들과 여친) 외식을 생각해 보니 요즘 날씨에 오라 가라 하기는 민폐(?) 같다. 게다가 바깥 음식으로 점점 불어나는 아들의 몸을 보니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미역국에 불고기라도 해서 집에서 먹고, 나머지는 아들의 최애 선물인 축하금으로 때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혼자 상황종료를 외치고 생일 전날 아들에게 “낼 몇 시에 저녁 먹을까?” 물었더니 “낼 약속 있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당황했지만 곧이어 밀려오는 안도감. 당황의 정체는 아직도 ‘그건 니 생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리 쓰느라 시간 낭비만 했다는 자괴감, 안도감은 장을 안 봐도 되고 그날 나는 ‘프리’라는 기분 좋은 느낌. 이건 내 생일 수준이다. 기분이 급상승 아들에게 내 카드를 주고 축하금도 조금 올려주고 수선을 떨다 보니 마음 한 켠 또 씁쓸해진다. 이제 아들의 생일상도 내 맘대로 차릴 수 없고 생일 밥 같이 먹으려면 미리 예약해야 하는구나. 돌이켜보니 아들이 생일을 가족보다 친구와 함께 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인데 아직도 가족의 생일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내 문제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고민할 필요도,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자칭 ‘성장통’이라 이름하고, ‘아직도 나는 성장 중’으로 해석하니 기분이 조금 풀린다. 그래 이젠 생일도 각자도생이다.
오늘은 예전부터 벼르던 후배의 작업실 가기로 한 날, 깨워야만 일어나는 아들이 생일을 기점으로 작심을 했는지 스스로, 그것도 일찍 일어나면서 슬슬 ‘퍼펙트 데이’의 조짐이 보였다. ‘좀 일찍 갈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후배에게 톡을 하고, 한 시간을 달려간 작업실에서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상자 속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리본으로 감싼 치즈 케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오늘은 생일이니 별수 없이 케잌만 보인다), 설마 우리 아들 생일을 챙긴 건 아닐 테고 다음 주 내 생일을 알고 있었나? (이것 또한 내 생각, 베이킹 좋아하는 후배가 방문 선물로 구운 것), 게다가 나를 위해 차린 밥상과 텃밭에서 키운 야채 꾸러미 선물까지, ‘오늘의 운수’는 보지 않아도‘대통’ 일 것 같은 감(느낌)이 아침부터 왔지만 뭐든 약간의 밀당이 필요한 법, 너무 설치면 도망갈까 모른 척했다. 하지만 너무 몸 사리는 것도 정신 건강에 안 좋은 것 같아, 생일날 아침 달라진 아들처럼 나도 오늘을 기점으로 새 모토를 만들었다. ‘좋은 일은 맘껏 오래 좋아하고 나쁜 일은 짧게 생각하고 보내자’.
잠시 물욕에 눈이 어두워 뒷전으로 물러났지만 오늘의 실제는 작업실행이다.
후배는 김포 외곽의 공장형 건물에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이름하여 생활 예술가다. 한적한 산 아래 자연 속에 있는 건물은 여름 별장 같아서, 그곳은 여름이면 생각나는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연상하게 했다.
재봉, 베이킹, 텃밭, 어반스케치, 완전 자연인은 아니지만 반 자연인 같은 그녀의 일상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그녀의 인스타에서 자연과 작업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누구나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오늘 주어진 실물 영접의 기회는 ‘퍼펙트 데이’의 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