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속 새빨개진 내 손을 지긋이 바라본다. 맹렬히 낮아진 기온에 세포들이 쪼그라든 탓도 있겠지만 오늘 내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유난히도 쪼글쪼글해보인다. 몇 초간 무심한 서글픔이 살짝 머물다 간다. 주로 양 가운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데 왼쪽 손가락엔 매일같이 실금반지를, 오른쪽 손가락엔 그때그때 내 기분에 따라 다른데 오늘은 지난해 여름 황학동 빈티지 마켓에서 1,000원에 득템한 하트가 이따만하게 퉁퉁하게 있는 무게감있는 은색 반지를 꼈다.
이전보다 확실히 뚜렷해진 목가의 실선이, 주름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요즘이라그런지, 차갑게 쭈글어든 듯한 내 손이 유난히 아련하게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젊음이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나이들어감인 것을 아련할 건 또 무얼까. 서글플 건 또 무얼까. 이내 이런 류의 감정을 레모네이드 넘기듯 후룩 넘긴다.
잘 유지해오던 나의 건강한 루틴과 일상과 패턴이 한 달 반 전쯤 와르륵 무너지게 됐는데, 그 시간동안의 내 정신건강은 참담한 수준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평소 몸이 날 것 같이 가뿐해야 가벼워야 내 정신상태가 온전하게 유지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한 달 동안 문제의식만 갖은채 무기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실수를 아주 오랜만에 범하고 말았다.
습관화된 무기력이 이토록 무서운 일인 줄 알면서도 때론 나로서도 어찌할 바를 못할 때가 있다. 다행인 건 새해.라는 명분으로 어제부터 몸과 마음의 에너지와 활기를 쭉쭉 당기고 있는 중이다.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도 절제하지 못하고 냅다 먹었던 나와,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도 대충 떼운, 잦게 과식했던 나를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냈다.
하루 지났다고 이토록 쉽게 예전의 나로 돌아온 것 같은, 곧 완전히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모든 루틴이 와장창 깨지기 시작한 순간은 평소 숙면을 취하고 아침 5시 반이나 6시면 눈이 절로 떠졌던 내가 숙면은 커녕 새벽 3-4시쯤 잠들게 됐던 시점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수면의 질이 좋지 못하니 그 다음날 아침이 가뿐할리가 있을까. 사뿐할 리가 있을까. 개운할 수가 있을까. 맑을 수 있었을까. 너무도 자명한 원인과 결과였다.
별일이 아니면 도시락을 싸고 다니는 나인데, 내 도시락통을 다시 소환했다. 일찌감치 식자재 마트에 가서 장도 한아름 봐왔다. 현미밥도 샀고, 오이, 브로콜리, 두부, 계란, 요거트 등등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들로 냉장고를 가득채우고 나니 "초아 네가 이제 다시 정신 차렸구나."싶었다.
한 달 동안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우울했을 그런 나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했을 나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기로 다짐한 것은 물론이다. 내가 하면 기분좋아지는 것들 중의 하나가 도시락 싸는 행위.인데 작은 도시락안에 나를 위한 음식.이라는 마음과 기운과 에너지를 담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담아내는 일. 알록달록한 다채로운 색감들로 뚝딱 요리해낸 음식들을 차곡차곡 하나하나 그 안에 쌓고 담는 일.이 어떨땐 황홀하기까지하다.
별 다른 건 없었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무기력함이라는 녀석. 그것도 고도화된 내재된, 습관화된 무기력함이라는 강력한 녀석이 날 찾아올 때 할 수 있는 일은 깨어있거나 이미 내 안에 침투해버렸을 때는 인정하고 다시 빠져나올 타이밍을 적확하게 찾아내는 일이다. 이번엔 후자가 돼 버리고 말았지만 눈치싸움을 치열하게 한 결과 그 적확한 순간을 어제부로 설정해 놓은바 지금은 아주 다행스럽게도 잘 지켜내고 있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배고픔이 왜 이리도 반가운지. 적당한 배고픔이 유지돼야 내 정신과 의식도 날카롭고 영민해 질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내가 도무지 왜 그랬는지. 무튼 다시 깨달았고 다시 알아차렸고 다시 의식했으면 그걸로 되었다.
오늘 오후에 집을 나서기 전 프렙해놓았던 재료들을 스테인레스 통에 고슬고슬하게 복슬복슬하게 담아 에코백에 넣었다. 이 스테인레스 도시락통 하나에 왜 그리 살뜰한 내가 되는지. 왜 그리 든든한지. 조금 부족하게 먹는 게 습관이 되면 각 식재료들의 식감은 또 왜 이리 사각사각한지, 부드러운지, 퐁퐁한지, 맛은 또 왜 이리 맛나는지... 이런 음식들을 아작아작 오물오물 씹을 수 있는 나의 튼튼한 이에도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음식에도 절로 감사하게 되고 어떨땐 이 건강한 식재료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아무렴 어떤가. 후우. 참말로 다행이다. 다시 내 생활 패턴을 찾게 돼서. 몸을 비우고 나니 내 정신이 맑아지는 이 감동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채움보다는 비움이 날 살게 하고 날 건강하게 만든다는 생각이다. 비우면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들이, 알게 되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야 어찌 이 잔잔한 행복을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사특한 생각일랑은 사라지고 초롱초롱한 생각들로 내 정신이 회복되니, 삶의 욕구와 의지가 솟아오르는 건 덤이 아니라 엄청난 기회라는 생각이다.
간혹 야심한 밤에 배가 출출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생오이를 송송 잘라 조미김 한 봉을 뜯어 싸 먹으면 환장하는 기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무튼 나 하나 통제하지 못해서야 제어하지 못해서야 되겠니 초아야. 습관화된 무기력이 널 흔들게 놔두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