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용도

by miu

메이크업 파우치를 열었다. 다소 케케묵은, 거의 다 떨어진 맥 쉐도우 팔레트와 브러시를 꺼냈다. 나만의 지리한 메이크업 순서를 마쳤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립스틱을 발라 주는 일만 남았다. 까무잡잡한 피부탓에 진작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립스틱 색깔을 갖은 연구 끝에 발견해 놓은터라, 내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핑크와 보라가 옹졸하게 섞인 묘한 색감을 내는 남대문시장에서 산 이름없는 로고없는 삼 천원짜리 립스틱. 다른 하나는 전 남자친구의 누나가 선물해 준 스테이 사틴의 Rouse립스틱 그것인데 작년엔 이 립스틱을 매일 같이 발랐던 것 같다. 화장품을 정리하다 생각지도 못하게 발견한 것인데, 선물 받은 당시에는 나와는 다소 안어울린다 생각하고선 한 쪽으로 치워놓았던 것이 분명했다.


웬 걸. 시험삼아 한 번 발라보니 지금의 나에게 너무 찰떡인게 아닌가. 그 이후 줄곧 이 립스틱을 애용해왔다. 색조 화장을 하지 않은지가 조금 되었던 터라, 오늘 한 메이크업이 조금은 낯설게 다가왔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색다르기까지 했다.


결국 오늘의 립스틱 선택은 아나가 선물해 준 립스틱이었고 문득 립스틱을 바르다 지나간 사랑.이 떠올랐고 기어코 사랑.이라는 단어에 꽂히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내.가 보였다. 얼마 전 간만에 단발머리를 했는데 마침 그이와 사랑을 했을 때의 내 헤어스타일과 꼭 닮았다.


요즘 자주 "사랑... 넌 사랑 안하고 뭐하니? 사랑 안하고 뭐한다니? 아이구 두야..."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사랑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 사랑 노래만 이별 노래만 주구장창 듣고 있는 내가 다소 모순적이랄까. 새해는 희망차게 밝았고, 내 결심 내 다짐 내 계획 내 목표도 희망차게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말이라도 사랑계획도 세워 보려 했으나, 사랑이 어디 계획 한다고 될 일이던가. 말도 안되는 마음을 바로 접는다.


하고 많은 철자 조합 중에 왜 "사랑"일까. 언어의 신비까지 느끼게 되는 이 사유의 무작위함이란. 무튼 올해는 낄낄껄껄한 사랑을 시작해보자고 다짐을 해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정확히는 서른 중반이 넘어서부터는 사랑이라는 큐피트의 화살이 쉬이 당겨지지 않는다. 큰일이라면 큰일이다.


게다가 B급 감성을 가진 여자.라서 B급 감성을 가진 남자를 찾기가 이리도 어려울 줄이야. 누구 탓도 아닌 아직 때가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 내가 아직도 더 알아야 할 게 배워야 할 게 많은 가보다.하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남녀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가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마법을 경험한다. 외형적인 마법은 물론이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마법에 걸려 영원히 이 마법이 풀리지 않기를 바라는 두 남녀가 존재할 뿐이다. 그 마법이 그리워서 우리 인간은 사랑을 그렇게 갈망하나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자꾸 나이나이 하게 되는 걸 보니. 진짜 나이가 들었군. 싶다. 의식의 흐름대로 몰입하며 써 내려가는 내 글에도 어김없이 나이나이.하는 걸 보니 확실하다. 사랑하기 바로 직전 서로의 말랑말랑한 퐁퐁한 감정을 확인하는 썸.의 구간일 때 사실 가장 설레고 짜릿하지 않나. 지금은 서로의 취향과 서로의 생각과 서로의 가치관과 태도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소위 진지하면서 웃긴 사람이 이상형이 되었는데. 언젠간(올해 였음 한다)내 앞에 떡 하니 나타나는 상상을 곧잘 한다.


사랑의 용도란 내겐 책의 용도와도 같다. 날 살게 하는 것은 물론 이전에는 전혀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나를 안내하는,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이리도 그토록 아름다운 거라서, 이제는 그 사랑의 용도.를 너무도 잘 알게 돼버려서 사랑 앞에서 외려 멈칫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삶이란, 내 안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는 일,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의 여정이지만 성숙하고 세련된 마음과 태도로 나와 내 삶 내 일상을 대하다보면 내 삶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도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올해는 계획 했던 일들 외에 사랑.이라는 녀석을 따로 똑 떼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관심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에도 편식없이 고루 나눠주기로 한다. 오랜만의 메이크업을 하다, 이미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다, 사랑에 대한 아주 얄팍한 고찰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사랑의 용도란, 날 살게 하는 날 숨쉬게 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예술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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