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부쩍 스페인이 그립다. 유럽의 첫 여행지로 선택한 곳도 겨울의 스페인이었으며 그 이후 한차례 더 떠났던 곳이기도 하고 코로나가 지나면 제일 먼저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참 닮았다. 흥이 넘치고 친절하며 정이 넘친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꼽으라 한다면 세비야를 빼놓을 수 없다. 세비아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그 공기와 풍경이 생생하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세비야 일정을 넣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벌써 7년은 되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났던 짧은 인연들은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스쳐 지나간 인연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스페인에 대한 그리움 또한 더 짙어지는 듯하다.
기억에 남았던 작은 일화 중 한 번은 숙소가 세비야 대성당 앞에 있었는데 호텔이 사진과는 조금 달라서 당황했던 기억인데, 내가 예약한 방은 옛 중세시대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짙은 고동색의 옷장과 흡사 영화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듯한 다리가 아주 높은 대형 침대가 있었고 왠지 모르게 으스스하고 스산했다. 꼭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음산한 기운이 들었다. 여기에서 머물다간 잠들긴 커녕 공포에 질린채 밤을 새울 것 같아 결국 방을 바꾸고 말았던 웃지 못할 기억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성스러웠고 고요했고 엄숙했고 차분했다.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됐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성당 곳곳을 둘러보았다. 운이 좋았다. 마침 아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뒷자리에 자리 잡고선 묵묵하게 미사를 지켜보았다. 세비야 대성당에서 누군가와 미래를 약속하고 웨딩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참 좋겠다.생각했다. 역사 속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 장소와 함께 거니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을까.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유럽 곳곳이 흥미로운 곳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곳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작은 빈티지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신나게 구경을 하 다 아주 오래된 듯한 동네 구멍가게 같은 카페를 발견하고선 왠지 느낌있겠다.싶어 주저 않고 들어갔다. 현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걸 보니 분명 동네 핫플레이스임이 분명했다. 내심 내 선택에 흐뭇했다.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 있던 중 사진 속의 두 노신사께서 인사를 건넸다. 동양인이 이 아침에 세비야의 동네 카페에 앉아 있는 게 흥미로울 수도 있었겠다. 두 그랜드 파파는 굉장히 유쾌했고 두 분 중 한 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셔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절하게 세비야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도 했고 세비야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하시며 커피값까지 내어주셨다.
게다가 혼자였으면 분명 지나쳤을 그 주변에 있는 빼놓지 말아야 할 역사적 유적지들을 직접 안내해주셨다. 참 따뜻했던 기억이다. 좋은 기억에 두 분의 사진을 남겼는데 두 분의 미소를 보면 점잖음은 물론이요 심상이 얼굴에 그대로 고스란히 나타난다.
가끔 스페인 여행 때의 사진첩을 들여다볼 때면 두 할아버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하는 생각이 든다. 낯선 곳에서의 특히 낯선 여행지에서의 사람의 인정과 인심은 늘 감동을 준다. 다음번엔 그 카페도 다시 찾고 싶지만 지금 찾으라 하면 그 카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운데 좁은 골목길 골목길을 지나다 우연히 즉흥적으로 들어간 거라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추위도 녹일 겸 아침식사도 챙길 겸 츄로스와 따뜻하게 데운 초콜릿을 사러 나섰는데 이번에도 즉흥적으로 찾자.했다. 현지인들이 줄 서있거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면 무조건 오케이다. 그곳은 카페는 아니었고 큰 창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곳이었는데 분주하게 츄로스 반죽을 만들고 튀겨내는 손놀림이 대단했고 이번에도 맛집을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와 아들이었는데 어머니인 사장님께서 내게 선물이라며 플라멩코 무용수들이 그려진 화려한 엽서 한 장을 츄로스와 함께 건넸다. 열정이 느껴지는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진 그 엽서가 취향저격이기도 했고 기억하고 싶어 한동안 냉장고에 붙여 놓기도 했었다. 세비야에서 지냈던 그 순간순간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돼 있다.
여행을 하는 이유. 내게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결코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라는 걸 굳이 느끼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고, 그 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기억할 게 있고 그리워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아직도 풀어낼 보따리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지난 시간을 결코 허투루 보낸 것이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난 행복한 사람. 그라시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