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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밤 Oct 25. 2019

안개 속 파아란 프레임

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곳의 이야기_람밤로그

파아-란 


울트라 마린, 코발트, 세룰리안, 아쿠아 마린, 아주 연한 퍼머넌트 바이올렛

수많은 색의 명칭을 두고도 그저 ‘파랗다’는 그 말로 기분마저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다. 

압력이 주는 적막함과 고요한 게 울리는 물소리, 규칙적인 나의 호흡 소리에 둘러싸여 파아란 세상 속에 가만히 놓인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 







70%를 웃도는 습도계의 표식에 한숨을 가득 내쉬며 뒤척거리는 밤을 맞이한 기억을 끝으로 눈을 뜨니 묘한 이질감과 함께 인식 가능한 무언가는 ‘파랗다’ 뿐이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금 상황에 대한 정보가 촤르륵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 사이판, 그로토. Saipan, Grotto



사이판의 스쿠버다이빙 포인트 중 하나인 그로토. 세계 10대 포인트 중 하나다. 

꿈이란 것이 늘 그렇듯 일의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고 그저 사이판의 그로토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뿐이 존재하는 순간이다. 


이곳은 라이선스가 있는 다이버만이 스쿠버다이빙을 할 수 있는 중급자 코스이다. 다양한 어종과 대물을 볼 수 있는 다른 포인트들과는 달리 이곳은 지형 다이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산을 뚫고 들어온 바닷물이 만들어낸, 해저동굴을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만큼 다양한 협곡과 같은 곳이 많아 초보자들에게는 까다로운 곳이기도 하고. 한 명이 겨우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법한 작은 곳들을 들락날락하며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와있는 것처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이곳. 

수많은 사람들이 코발트 색의 물감을 물에 풀어놓은 듯하다고 표현을 하지만 직접 그 바다를 본 사람은 안다. 안료를 풀어 만든 물의 색과는 달리 바다의 푸르름은 태초의 것 그 자체다. 태초에 지닌 그들의 색은 그 깊이와 빛의 양, 한낱 인간의 저조한 시력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물속에 귀가 잠기는 것 또한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현실의 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수많은 니모들을 이끌고 다니는 물고기들의 선두이자 거북이와 악수하며 뽀글뽀글 거품을 당당히 내뱉는 의심의 여지없는 다이버다.

‘시력이 곧 시야다’라는 말을 절감하며 혹여나 더 보일까 눈을 있는 힘껏 찌푸려본다. 절벽을 등지고 마주한 망망대해는 우주를 연상시킨다. 방대한 바다의 모습은 그 크기가 짐작조차 되지 않고 과연 나는 이 바다에서 이렇다 할 부피를 지닌 무언가는 되려나 하는 생각조차 든다. 온몸 가득 느껴지는 압에도 불구하고 땅 위의 어디에서 보다도 가벼운 나는 모든 곳을 자유로이 누빌 수 있다. 


새로운 감각의 자극은 새롭다 못해 짜릿하다. 


위를 바라보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더 잘게 부서지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익숙한 무언가도 바라보는 각도를 다르게 했다는 사실 만으로 전혀 새로운 무언가로 느껴진다. 위로 튀겨지는 하얀 거품과 바닥에 깔린 모래 위로 얕게 부서지는 파도만을 봐 왔던 내게 아래로 깊게 부서져 퍼지는 파도의 부피는 까마득한 새로움을 안긴다. 내가 내뱉는 투명한 공기방울과 하얀 거품과도 같은 파도가 만나는, 



수평선은 비선이 없다

천양희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바라만 보다가 바보가 되어도 좋다고 했나

수평선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나

참으로 큰 것에는 끝이 없다고 했나

끝없는 것에는 대상도 없다고 했나


누가

모든 것 다 받아준다고 바다라 했나

받아만 주다가 바보가 되어도 좋다고 했나

수평선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나

참으로 넓은 것에는 한이 없다고 했나

한없는 것에는 시공이 없다고 했나


바라만 보다가 수심 깊어지는 나여

저 바다에도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차

파도 소리 하나 물결 한 점 들어낼 수 없네

수평선이 기울어질 것 같아

수평선이 기울어질 것 같아





도시다. 

압과 같은 적막을 뚫고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음성의 교류가 귀를 파고든다. 그리고 눈 앞에는,





# 더 베슬. New York, The Vessel


오호, 뉴욕이다-. 그리고는 또 새롭게 입력되는 정보들.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어가고 있는 이곳. 영국의 유명 건축가인 Thomas Heatherwick의 작품으로 250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형은 벌집을 꼭 닮았는데, 이 이질적인 조형물은 뉴욕 여행 사진들에서 점차 지분을 차지하며 그 입지를 다져가는 중이다. (아마도 그 사진을 본 덕에 나 또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이곳을 오르려면 티켓이 필요한데,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을 했다면 무료로 예약한 시간에 맞추어 기다림 없이 오를 수 있고,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당일 그곳에서 두세 시간 정도 기다리던가 혹은 10달러 정도면 바로 오를 수 있다. 물론 이곳은 인과관계없는 꿈 속이기에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에는 티켓이 들려있었고 나는 입장을 하고 있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그 모양과 끝이 존재했다. 

빼꼼히 그 끝을 보이는 건물들을 끼고 푸른 하늘은 일정한 모양을 가진다. 마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을 연상시키듯. 같은 모양의 틀을 지닌 채 같은 곳을 담고 있을 지라도 높이의 차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구역 하나하나는 빈번히 새로웠다. 새로운 시야와 경험을 선사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곳으로 빙글빙글 돌며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는 그 사실 또한 평범치는 않았다. 

중반부쯤 오르자 보이는 광경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와 함께 아랫부분은 베슬의 칸칸으로 둘러싸인 풍경으로 마치 윗부분은 다 맞추어진 퍼즐과 같고 아랫부분은 아직 맞추어지지 않은 퍼즐이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높은 시야가 가진 깊이감이 칸칸이 분리된 프레임과 만나 평면의 액자와도 같은 감상을 건네는 듯.

맨 위에 다다르고 나서는 칸칸이 보이는 풍경도 이제는 익숙해진 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맨 위에서도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서 보는 더 베슬의 내부 모습 때문이었다. 

마치 sf영화의 세트장과 같은 매우 구조적이고 꽤나 미래적인 광경이었다. 혹은 곤충과의 전쟁과 같은 테마를 가진 영화에서 나올 법한 곤충의 집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평소에 2D로만 보아왔던 모습이 화려한 깊이감을 지닌 채 내 눈앞에 나타나니 그 또한 지나친 이질감을 선사했다. 평소에는 볼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황동색의 번쩍이는 질감이 그 이질감을 더욱 상기시켰다.

단순한 전망대에서의 경험이 아닌 다양한 시야와 감흥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이곳.



놓았거나 놓쳤거나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중략)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이쯤 되니 이제는 매일 밤 여행지의 정보를 찾아보고 잠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휴가 가는 대신 날 잡고 5박 6일 정도 매번 이렇게 구체적인 여행 꿈이나 꿨으면 좋겠네.






이곳은 익숙하다. 경험의 재현이다. 지난해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의 순간 중 하나다. 



# 바나 힐. Danang, Bana Hill 


다낭의 바나 힐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는 길. 장장 30분가량을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 한다. 말 그대로 산 하나를 타고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은 꽤 가파르고 그 높이가 상당하다. 고소공포증이 조금 심한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바나 힐 방문을 망설이기도 한다고. 하지만 온갖 위험한 일을 억지로 상상해내지만 않는다면 평소에는 절대 보지 못할 풍경을 편안히 30분 동안이나 감상할 수 있다. 


매 순간순간마다 변화하는 풍경은 소소한 볼거리를 찾는 재미가 있다.

열대지방의 식물로 빼곡한 산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특이한 모양의 나무를 발견한다던가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그 정체를 드러내는 폭포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저 높이 있던 구름이 내 옆을 지나 발밑으로 오는 경험까지. 이 모든 순간 내내 그 경험들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들었던 것은 자욱이 깔린 안개 덕택이었다. 

워낙이 안개가 가득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그곳을 갔던 날 유난했던 안개는 케이블카를 타는 30분 내내 우리 곁을 함께 했다. 



높이에 대한 인식과 마치 ‘무’의 공간에 놓여 있는 것만 같은 내 시야로 인한 인식 속에서 어딘가 신비롭기도 하고 어딘가 공포스럽기도 하며 짜릿한 그 경험은, 실은 어떤 아름다운 볼거리보다 황홀했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뿌연 서울의, 20층 높이의 내 방에서 바라보는 그 모습과는 달랐다. 


아직 10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래도 20분은 더 탈 수 있다. 꿈이니까 도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 신비함 속에 놓이고 싶다. 





으 더워, 

땀이 흥건하다. 

이런, 



서울, 아침, 습도는 어김없이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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