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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줴이 Feb 13. 2022

개인의 역사 -스노보딩 편(1)-

어쩌다 보딩

2000년부터 스노보드를 타기 시작했으니 햇수로만 22년 차인 셈이다. 지금은 글쓴이 인생 전반에 운동이 일상으로 침투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격렬한 운동은 고사하고 우아한 운동에도 관심 없던, 스포츠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던 염세주의 인간일 뿐이었다. 생애 처음 웨이크보드를 타고나서 무릎에 불편함이 감지되어 난생처음 정형외과에서 무릎 엑스레이를 찍었을 때 내 무릎의 연골은 50대 건강한 남성보다 못한 상태였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운동을 너무 했거나 너무 안 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데, 당시의 난 이것도 저것도 연관 지을 수 없는 보통의 생활자였다.

더운 것보다 추운 걸 더 싫어하는 인간인데 난생처음으로 간 스키장은 온통 눈으로 덮인 세계인 데다가 자꾸만 넘어져 온몸이 쑤시기까지 하니 빨리 집에나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설원의 슬로프를 가르며 신나게 달리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니 영혼 없는 동공으로 휴게실에서 시간만 축낼 뿐이었다. 슬로프로 올라가 연습할 생각보다는 동기를 찾을 수 없는 몸뚱이로 빨리 운영시간이 종료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나는 어쩌다 스키장엘 가게 되어, 어쩌다 스노보드를 타게 되었고, 어쩌다 해마다 스키장엘 오가다 보니, 또 어쩌다 해외 원정까지 가는 상급 보더가 되었다.



당시 2000년 초반에만 해도 스키장을 활보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스키어들이었고 보더는 극히 일부였다. 그 때문에 두드러지는 스키장 풍경 중 하나는 슬로프 정상에서 확인되는 유저들의 모양새였다. 스키어는 데크를 각각 발에 장착한 채로 리프트에 승하차해 비교적 다리가 자유로운 반면, 보더는 양 발이 하나의 데크에 묶여 있어 스키어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 때문에 리프트를 타고 내릴 땐 한쪽 발을 데크에서 분리해 다른 쪽 발에 연결된 데크를 밀고 끌면서 이동하거나, 양쪽 발 모두 데크에서 분리해 손 들고 탑승해야 한다. 스노보더는 스키어와 다르게 양 발이 하나의 데크에 묶여 있고, 등산스틱처럼 폴대도 없기 때문에 발이 자유롭지 않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슬로프에서의 라이딩이 아닌 경우 리프트 상하차 지점에서는 데크라 불리는 판때기에서 한쪽 발을 분리해 밀고 끌거나, 양쪽 발을 모두 분리해 손으로 들고 가야 하는 것이다. 초보자의 경우 족쇄 같은 보호대와 부츠 때문에 엉거주춤한 자세를 컨트롤하기 어렵기 때문에 데크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는 걷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데크를 양쪽 발에서 완전히 분리해 손에 들고 탑승하는 후자의 방법을 취한다.(그러나 원칙상 리프트에 탑승할 땐 안전상의 문제로 꼭 한 발에 데크를 장착해야 한다)

양 발에 각각의 데크가 부착되어 있는 스키어의 경우 리프트가 하차지점에 도착하면 그대로 미끄러지듯 슬로프를 향해 하강한다. 반면 보더는 데크에서 분리된 한쪽 발을, 초보자의 경우 양쪽 발을, 다시 데크에 장착하기 위해 슬로프 정상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데크를 발에 부착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리프트 하차 지점인 슬로프 정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빳빳하고 여유 있게 서 있는 스키어, 그리고 엉거주춤 몸을 구부리거나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있는 보더가 확연히 구분된다. 글쓴이가 보드를 타기 시작한 당시엔 슬로프를 활보하는 이들 대부분이 스키어들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보다 많은 수의 보더들이 슬로프 정상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진 치고 앉아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상급자의 경우 슬로프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는 경우는 드물다. 눈 쌓인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면 엉덩이에 묻어 있는 눈 뭉치를 털어야 하고 망가진 옷매무새도 고쳐야 하니 굳이 앉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초보자는 중심 잡기가 어려워 불가능한 일이다)


스노보드라 칭한 부분이 데크이다. <사진출처 : 두산백과>


초보시절 한 시즌에 한두 번 가던 스키장을 언제부턴가 시즌권을 끊어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내게 겨울의 시간은 곧 보딩의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여자 메이트들은 일회성 보딩이 전부인 탓에 속도가 맞지 않았고, 어쩌다 함께 하게 되면 타는 법을 알려주느라 정작 내가 탈 시간이 없었다. 반면 남자 메이트들과 같이 타게 되는 날에는 함께 정상에 올라가더라도 내려오는 속도가 다른 데다 기다려주는 자비 따위 없어 가랑이 찢어지게 쫓아가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여자 메이트들과 함께 탈 때 보다 2배는 더 슬로프를 오르내리게 된다. 속도가 맞지 않는 여자 메이트들 때문에 지루해하는 나를 두고 오빠는 여자애들이랑 같이 타지 말라며 끈기를 보이지 않는 그녀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남매와 같이 타면 오빠라는 인간의 자비 없음에 그날의 보딩은 확실히 빡세다) 그렇게 홀로 스키장을 누비며 그라운드 트릭을 부렸고, 역 지로 자빠지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급체하면서, 쓸쓸하지만 심심하지는 않게 매 시즌의 겨울을 스키장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근접한 비싸고 감질나는(슬로프 길이가 짧아 감 좀 잡을라치면 슬로프가 끝남) 스키장에서부터 서울에서 멀지만 라이딩할 맛 나는 강원도까지, 겨울만 되면 허벅지를 불태우며 근육통을 이겨내던 나는 스키장 시즌권자였다.  

시즌권들


스노보딩 마니아들은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그다음 시즌을 준비하는데, 한 시즌 동안 만신창이가 된 데크를 손보고 왁스질 하며 장비의 업그레이드를 고민하기도 한다. 다음 시즌보다 앞선 계절에 시즌권을 포함한 모든 장비의 세팅을 끝내거나, 추석이 오기 전 필요한 장비를 최적의 가격에 마련하고는 첫눈 소식을 신호탄처럼 기다린다. ​


(2편에 계속..)


https://youtu.be/n0F6hSpxaFc

https://youtu.be/8WoHr_CdjHI


*(cover image)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남자 하프파이프(프리스타일) 숀 화이트의 모습. <나무위키 - 스노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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