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뛰어넘는 겸손 레시피

CHAPTER 5. 한 차원 높은 최선

겸손의 지금



“무대 위에서 고생하시는 스태프가 많다. 높은데 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서는 더 낮은 곳에서 고생하는 많은 카메라 감독과 스태프들과 이 영광 나누고 싶다.”

-유재석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인데….”

-황정민


시상식에서 겸손한 소감으로 더 많은 인기를 얻은 두 명의 연예인의 말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도 매일같이 겸손을 품고 다니지는 못할 겁니다. 자존심 세우는 게 겸손해지는 것보다 쉬우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디지털 세상에서 겸손의 인기는 말라가고, 단어의 무게감도 예전만 못합니다. 경쟁, 휴식, 자기계발이 떠오르는 단어라면, 배려, 겸손, 양보 같은 말은 돼지비계처럼 썰려 나갑니다.


20대에 몰랐던 것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중간의 가치’에 대해 무지했었습니다. ‘정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세상을 좌우로 긋고 살았으니까요. 겸손에 대한 관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성공하면 필요 없는 것, 나를 숙이기만 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프란치스코 교황, 에이브러햄 링컨. 어떻게 그들은 겸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을까요? 자만, 고집, 자존심. 마음속 해충 3종 세트를 박멸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겁니다.




진정성의 우위



몇해 전 발행했던 하나의 칼럼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본 사람들은 26만 명으로 지금까지 썼던 글 중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을 느꼈습니다. 메시지 전달력에 있어서 2퍼센트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신의 글을 부정하는 건가요?’, ‘공감한 사람들은 뭔가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글이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싫습니다. 직장에서 매일 생존형 비겁자로 사는데, 글에서라도 자생형 선인장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내 글에 대한 냉정함’도 가져다주더군요.


지친 영혼을 부여잡고 퇴근의식을 치르던 독자들, 그분들은 어찌되었건 시간을 써서 제 글을 읽었습니다. 100배쯤 오만했던 때의 저였다면 ‘안 읽으면 말지 뭐’ 또는 ‘네이버 메인에 내가 올린 건 아니잖아’ 했을 겁니다. (겸손에서 멀어지는 최고의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독자들이 ‘비공감 두 번 먹어’ 이런 생각이라면?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답글 투어를 시작합니다. 칭찬해주신 덧글에 부족하다면서 더 노력하겠다고 했고, 악플과 비평의 덧글에는 더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를 낮추면 겸손한 마음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고마움과 서비스의 중간쯤 되는 액션이었습니다.

SK에 이어 고양 원더스와 한화 이글스의 신화를 만들어낸 김성근 감독. 그는 영화 ‘파울볼’에서 열세 번째 사퇴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간 많은 사람들은 그걸 세고 있더라고.”


‘그런 것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닐까요? 명장의 격언에 빗대어 겸손을 이야기해보자면, 독자들에게 겸손해지는 방법은 나를 낮추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고마움과 감동을 가슴에 품고 ‘더 좋은 글을 써내는 것’입니다.

상사나 간부에게 필요 이상 숙이는 게, 겸손한 사원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물론 예의 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는 있겠죠. 내가 조금 불편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보기 편하게 만드는 정장처럼.

그렇지만 예의와 겸손을 하나로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의는 자신보다 타인을 조금 더 우위에 둔 것이라면, 겸손은 내 진정성을 우위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과 신뢰를 냉정하게 받아들여,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겸손에 가깝습니다.


겸손의 사전적 정의는 ‘나를 내세우지 않고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입니다. 여기에 ‘아부’나 ‘가식’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당당해지는 겸손법



『어떻게 배울 것인가』의 저자 존 맥스웰은 “겸손해지면 자신과 삶에 대해 진실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겉보기엔 진부한 말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의 정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진실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빛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존 맥스웰의 격언에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습니다. ‘내가 진실되었을 때 겸손이 더 빛난다’는 말입니다. 맹목적 시도보다, 진실되게 살겠다는 포부가 있어야 제대로 된 겸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겸손을 위한 겸손보다, 진실된 삶을 통해 나오는 겸손이 더 가치 있습니다.


겸손에서 멀리 있기로 소문난 사람이 저였을 겁니다. 자만과 고집, 자존심에 나름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발목을 잡는지 압니다. 그러니 말로써 남의 눈을 속이는 ‘겸손한 척’은 나를 오염시킬 뿐이라고. 단점을 받아들이고 세상과의 핀트를 맞춰나가는 ‘당당해지는 겸손법’을 택하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15년을 사는 많은 직장인들이 스스로 만족사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사회 초년생으로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 어떻게든 빠르게 세상과 핀트를 맞춰보려 했습니다.

회사에서 빠르게 인정받으며 타인의 눈을 적당히 속여 예의 바른 척도 해보고, 일 잘하는 척 꼼수도 부려봤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항상 ‘시궁창으로의 입수’였습니다. ‘거센 절망’이라는 벌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겸손을 제대로 배우려면 버림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버림은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며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뛰어넘는

겸손 레시피



아래는 제가 회피했던 겸손 앞에 맞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과정입니다.


실패 + 반성 = 비워내기

선입견 버리기 + 객관적 판단 = 배움의 자세 갖기

피드백 받아들이기

세상이 원하는 것 +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 = 조율


이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겸손을 배울 자세가 되었구나’라고 느끼려면 피드백 과정까지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한번 거치고 나서야 평생 동안 피해만 다녔던 악플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영양제라 생각하고 먹을 순 없지만, 사약과 보약 중간쯤 된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저들의 악플이, 그들의 이유 있는 불만이 ‘세상의 문제일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존심 강한 투수들은 승부수로 던진 공을 타자가 파울로 쳐내면 오기가 발동해 다시 같은 공을 던진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는 같은 공을 두 번씩이나 놓치는 타자는 없다. 아마추어에서는 오기지만 프로에서는 객기에 불과하다.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오기와 자존심으로 매번 같은 공을 던졌고, 그 오기의 잔재는 아직도 남았습니다. 겸손하겠다고 마음먹어보지만, 또 언제 자만이 머리를 들이밀지 모릅니다. 그때는 다시 비우고,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프로세스를 다시 거치면 됩니다.

당신에게 겸손의 아이콘이 돼라! 이런 흔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겸손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겸손은 나이 먹음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뛰어넘겠다는 간절함에 비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