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아침 6시 15분, 평소처럼 눈이 퍼뜩 떠졌다. 꿈도 꾼거 같다. 보스가 또 나왔는데, 여느 때처럼 무언가 빵꾸 나서 힐난을 듣는 상황이 아니라 수고했다며 무언가를 주셨다. 이제 끝나긴 했나보다. 휴직 첫날이다.
왠지 꾸물거리면 안될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젯밤 9시부터 누웠으니 꾸물거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씻었다. 씻고 조금 기다리니 아이들이 일어났다. 율솔에게 아빠는 회사 안가는 날이라고 말해주고 (왠지 심드렁한 아이들 반응) 하루를 시작했다.
여유롭게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마을버스를 탔다. 아이들은 여전히 바깥풍경을 보고 쉴새 없이 조잘거렸다. 모든게 새롭게 입력되는 시기에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 생각하니 새삼 더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보스, 카톡이라도 드릴까 하다가 관뒀다.
어린이집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뒤도 안돌아보고 들어가버렸다. 쾌재를 부르면서 근처 북카페로 올라갔다. 카페 통창 앞에 앉아있으면 이따 아이들이 나들이 나서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신의 물방울이라는 일본만화를 펼쳤다.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었다니. 생각해 보니 한잔의 맛에서 그려낸 술맛 표현이 신의 물방울에서 착안한건지 싶다. 와인을 한잔 맛본 주인공의 느낌을 그려내는 표현들 - 꽃밭에서 여신의 뒤를 쫓는다든지 - 이 예사롭지 않았다.
회사에서 이것저것 물어오는 질문에 몇가지 답을 해주고 뭐하냐길래 만화책에 커피를 찍어서 보내줬더니 과도한 설정샷 아니냐고 반발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커피 한잔 옆에두고 책읽고 여유부리기.
아이들이 계곡 나들이가는 것을 지켜본 후 신의 물방울을 몇권 더 읽고 슬슬 은행으로 향했다. 지난 3년간 못해본 평일날 은행가기가 휴직 첫날 하고픈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앞으로의 1년을 대비하기 위해 2개의 적금을 깼다. 뭐 그래봤자 한달 월급도 안되는 돈이었지만 일단 깼다. 마이너스통장 금리에 연동되어 있어 잠시 망설이긴 했다만 미리 결정한대로 둘다 해지하고 전투자금에 보탰다. 돌아오는 길에 또 뭐 팔 것이 없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책 몇권과 이제는 쓰지 않는 아이들 카시트를 팔기로 했다.
점심은 요즘 한창 맛들인 메밀 막국수로 후루룩 먹었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나야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니 그려러니 하고 기다렸다. 부자들이 시간을 쪼개고 사들이지만 내가 누리는 여유까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점심을 먹고 차에 기름을 넣으러 의정부까지 갔다. 드라이브도 할 겸, 그리고 아이들 빤쓰도 아울렛에서 살 겸. 오다가 아내랑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우면서 휴직 첫날을 장식했다. 앞으로 일년동안 서로 동선이 안겹치도록 적당히 노력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혼자 어린이집에 갔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기를 그리면서 시간을 끄는 율이를 살살 달래 먹구름을 뚫고 서둘러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날갯짓을 하며 거실을 쾅쾅거리던 율이가 "아빠, 사람은 왜 못날아?"라고 물어봤던게 실마리가 되어 종이를 잘라 나무젓가락에 붙이고 새를 만들어 날려보았다. 물론 나무젓가락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종이 덕분에 대실패.
사람은 커녕 나무젓가락도 날리지 못한 우리는, 앞으로 일년 마음으로만 훨훨 날아다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