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상품의 매몰비용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탐닉하게 된다. 하드웨어는 앰프와 스피커를 의미하고 소프트웨어는 음반을 말한다. 이 중 하드웨어는 자주 사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값도 비싼데다가 또 자꾸 바꿔야만 할 이유도 특별히 없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자꾸 새로운 음악, 새로운 연주를 듣고 싶어서 새로운 음반을 사게 된다.
그런데 어떤 애호가는 이렇게 사서 모은 LP판이 수 만 장이 있다고 자랑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실 수 만 장의 음반을 다 들어볼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박스 떼기로 수 십 장, 수 백 장씩 사는데 거의 안 듣고 방안 가득 쌓아 놓는다. 그건 광적인 수집이지 음악을 좋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렇게 한 번에 수 십 장 수 백 장씩 파는 LP판은 과거 음악다방이나 카페에서 사용하던 음반이다. 때문에 굵은 바늘과 침압이 무거운 MM식 (Moving magnet) 카트리지를 사용한 음반이라 소리 골도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드물다. 이런 음반을 속칭 '똥판'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 만 장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 앞에서 기죽을 일 하나도 없다. 제대로 듣지도 않는 음반 수 만 장 있으면 뭐하냐는 말이다. 똘똘한 CD나 LP판 몇 백 장 정도를 가지고 늘 음악을 듣는 사람이 솔직히 훨씬 더 음악적이고 인간적이다. 반면 전자는 고물상적(ㅋㅋ)이거나 과시적이다.
그런데 이 음반이라는 것이 좀 특이하다. 모든 상품들과 달리 이른바 '매몰비용의 오류성'이 아주 높다. 그럼 '매몰비용의 오류'가 과연 무엇일까? '매몰비용의 오류'에 대한 예를 한 가지 들어보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우리가 홈쇼핑에서 옷을 세 벌 샀다. 도착해서 입어보니까 좀 작다. 그래서 반품했더니 돈을 도로 돌려준다. 그런데 반품 전에 살을 약간만 빼면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2kg만 빼기로 작정하고 반품을 안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는데 바빠서 살을 못 빼고 옷도 반품 못 해서 옷을 그냥 처박아 두게 됐다. 이렇게 상품의 반품 시기를 놓쳐서 손실을 본 것을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통상 말한다.
대체로 매몰비용의 오류성이 가장 높은 상품은 문화상품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영화표나 연극표를 구매한 후 1분을 보고 재미없어서 반환해달라고 하면 미친 놈 취급한다. 그런데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끝까지 지겨운 내용을 다 보고 나온다면 시간적 정서적 손실이 더 커진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매몰비용의 오류이다. 음반도 마찬가지이다. 참 거지같은 음반인데 산 것이 아까워서 계속 들을 수 있을까? 이 역시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음반의 경우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음반을 사면서 뜯어보고 들어보고 마음에 안든다고 반품을 할 수 있었던가. 평생 음반을 사면서 반품 받아주는 음반 가게는 단 한 군데도 본 적이 없고, 또 반품을 해본 적도 단 한 번도 없다. 아마 반품하겠다고 했다면 위 아래로 훑어보면서 속으로 분명 "정신 나간 놈 지랄하고 있네" 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반은 출고 되면서부터 매몰비용 오류를 태생적으로 안고 나오는 것이다.
더 애석한 것은 음반을 여러 장 사서 들어보면, 경험상 열장 중에 두어 장정도 괜찮다. 그도 그럴 것이 귀로 듣는 소프트웨어의 판단의 기준이 고작 겉표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겉표지만 보고 사서 그 음반이 괜찮을 확률은 20~30%를 넘지 못한다. 결국 70~80%는 사는 동시에 매몰비용 오류 영역으로 바로 들어가는 셈이다. 그래도 요즘 다행인 것은 유튜브 덕분에 음악을 미리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매몰비용의 오류성이 현격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고 '괜찮을 확률'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럴 때 살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나는 참 소박한 촌놈이 분명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