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시호일
나의 취미는 영화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차를 마시는 취미도 있다. 그렇다고 대단한 다도를 하진 않는다. 물론 다도를 하시는 선생님께 배워보기도 하였지만 다도는 격식이 굉장히 강조되는 행위라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도 행위에서 내가 할만하다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는 편이다. 그래서 제대로 다도를 배우거나 다도 자체에 큰 열정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차를 취미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차 자체가 가진 맛을 좋아해 차를 최소 하루에 한 잔은 먹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커피 한 잔, 차 한 잔은 꼭 마신다. 그래서 올해에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차를 테마로 한 중국 여행'을 드디어 실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눈이 돌아서 자스민부터, 백차, 운남 홍차 등 여러 홍차를 대량구매하고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예술이라고도 평가되는 다도에 관심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차와 함께 하는 차생활자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 차에 꽂힌 것은 어머니의 취미 생활이 다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집에 차가 넘쳐났고, 자연스럽게 차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일일시호일'이 개봉한 이후, 어머니가 참여하고 계시는 차 모임에서 이 영화가 꽤나 핫한 대화주제였던 듯했다. 그래서 한 번 보라는 추천을 받았고, 그래서 봐보았다. 일본의 명배우 키키 키린 배우가 출연했던 점도 영화를 보게 된 어필 포인트였다. 그래서 보았고,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다. 그런데 그 지루함이 나쁘지 않았다. 차라는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와는 달리 '내 길을 간다'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취미인 만큼 무조건 빠르게 세상을 발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지점이 오로지 차를 주제로 했다는 것이 느껴졌고, 차를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주제로 한 영화는 세상사의 기준에서 지루함이 디폴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노리코는 처음 다도를 시작했던 미치코와는 다른 곡선의 인생을 산다. 속도로 치면 미치코는 빨리 가는 편이고, 노리코는 느긋한 편이다. 언제나 자신보다 인생 경험을 일찍 하는 미치코를 보며 노리코는 조급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노리코는 관성적으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사람마다 가는 속도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나이대에 꼭 해야만 경험치는 따로 있지 않다. 내가 20대에 하는 경험을 누군가는 30대에도 할 수 있고, 70대가 되서야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나 블로그에 나돌아다니는 글들 중에서 '20대에 꼭 해야 할 인생 경험 리스트' 같은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하는 듯한 글들은 잘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처한 위치와 감정이 다른데, 인생 경험을 나이에 국한하는 것은 좀 젠체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20대에 이런 경험 하지 않으면 너 후회할 걸'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거 아닌 가 싶은 것이, 20대에 그걸 하지 않아 후회하더라도 후회한 이후에 해도 크게 늦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한해서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치코는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고, 노리코는 자신의 성향과 성향에 맞는 선택을 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노리코의 삶을 더 추구하긴 한다. 느리더라도, 나의 길을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노리코가 차를 마시며 비를 느끼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름에는 녹차를 먹고, 겨울에는 홍차, 보이차 같은 발효차를 많이 마신다. '오늘 날씨에는 이런 차를 먹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도 영화가 말하고자 한 '일일시호일'을 충족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차를 마시면서 나의 과거를 관조하되, 심하게 몰두하지 않지는 않고,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삶, 그것이 일일시호일이 아닐까. 내 자신을 내가 평가해본다면, 나는 트렌드에 별 관심이 없고, 내가 관심이 없는 부분에서는 무식할 정도로 잘 모른다. 그래서 주위에 친구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것에 우울해하지도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혼자 잘 노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취미가 차 마시기라는 것만으로도 꽤나 당연한 수순인가 싶다가도 차를 마시는 것을 습관화한 덕분에 '나다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애초에 세상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휩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차 마심으로써 이런 나의 모습이 고착된 것 같다. 이것이 아집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수 밖에 없겠지, 그것이 나의 과제일 듯 하다. 마치 노리코가 차를 꾸준히 하다보니, 차를 가르쳐볼 기회를 얻어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었듯, 나도 차를 계속 하다보면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노리코를 보면서 희망을 가져본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뜨끔했던 지점이 있다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정제된 몸짓 속에서 정갈한 마음으로 차를 하시는 분들이 나오시는데, 나는 다도라는 장르에서 그 부분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보고 격식도 없이 차를 마시는 무식한 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격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격식을 제대로, 반복학습 해가면서 배우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급하게, 속성을 배운 자의 무지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