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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Sep 21. 2020

당신은 나의 올가미

시월드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할머니와 나의 관계성은 정말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집안에서 첫 째로 태어나서 모든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 나는 한 때, 한 동안 할머니의 인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나도 점점 머리가 크면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2주에 한 번 꼴로 보게 되는 할머니의 매번 수용하기만은 힘든 요구 사항과 보이지 않는 엄마와의 이간질이 있음을 느끼고 나서부터 나는 할머니와 점점 멀어졌다. 점점 엄마 편을 드는 빈도가 늘어났다. 잘잘못을 정확히 구분짓고 싶었던 어린 내가 할머니 눈에는 배신자처럼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나는 할머니에게 "지 엄마 편만 드는 나쁜 년"이 되어있었다. 나로서도 할머니의 삐뚤어진 사랑을 받을 바엔 미움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15년이 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트집 잡는 주제는 언제나 같다.


'네가 내 아들을 잡고 사니. 착한 내 아들이 기를 못 펴고 사는 거 아니냐.'

'네가 내 착한 아들을 뺏어가서 착한 내 아들이 네 편이나 들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네가 내 아들을 잡고 사니, 이렇게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고 사는 것이 아니냐.'

'넌 내 아들 같은 사람을 데리고 살면서 뭐 이렇게 불평불만이 많냐. 네 인생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니, 네 남편만 제대로 서포트하는 게 그렇게 어렵니.'

이런 류의 내용인데, 여기서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모든 상황을 아빠의 신격화에 이용하는 버릇이 있으시다. 그럴 때에 항상 모든 일에 반박을 하던 과거의 나에게 엄마는 항상 하던 말이 있다.


"너 진짜 너네 할머니 같아. 그렇게 모든 언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진짜 이기는 게 아닐 때도 있어. 그렇게 너를 튀어보이게 하면 공격 대상은 네가 되는 거야. 그럴 땐, 그냥 네 그러시군요 하고 넘겨야 할 때도 있는거야."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그 말에 납득이 간 이후부터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한동안 웬만한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그저 듣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참는 횟수가 잦아지면 크게 폭발이 생긴다. 사건은 어제 발생했다. 내가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사건 발생 시각은 9월 20일 오후 5시. 우리 집 옥상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창 잘 먹고 난 이후에 우리 아빠는 언제나처럼 라면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와, 그 얘기 왜 안 나오나 했다. 우리 집에서 라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 지금쯤이면 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라는 멘트를 던진다.

그래서 라면을 챙겨주냐 마냐로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의 멘트가 끼어든다.

"네가 이렇게 고기까지 구워주는 내 아들에게 밥을 제 때 안 해주니, 내 아들이 먹을 게 없어서 라면이나 끓여먹는 게 아니냐."

갑자기 엄마와 나 사이에 어이없어하는 기류가 한 2초 정도 흐르고, 멘트 공격은 내가 먼저 시작했다.

"할머니, 엄마는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준비하죠. 그런데 아빠는 엄마 음식 안 좋아해요. 그래서 식사가 맘에 안 들면, 라면을 끓여먹어요. 그게 할머니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 음식을 잘만 차려주었다면 안 먹었을 리가 없다. 그걸 왜 안 먹는데?"

"아빠는 MSG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니까요. 그게 아빠 입맛이에요. 그러니 엄마가 식사를 안 차려 준다고 뭐라 하시는 건 할머니의 오류세요. 음식을 거하게 차려놔도 고기가 없거나 MSG가 없으면 밥상에서 피자, 치킨 먹자고 하는 사람인데, 지금 엄마가 제 할 일을 안 했다고 얘기하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내가 또 지 엄마 편만 든다고 버럭하려고 하시자, 엄마가 내가 더 실수할까봐,

"그러니, 어머니도 제가 만든 밥상 드시면서 그런 이상한 주장하시면 어떡해요. 얘도 어이없어서 이런 말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 멘트는 비단 할머니만을 이기기위해 했던 말은 아니다. 이것은 팩트니까. 엄마는 매 삼시 세끼 아빠에게 12첩 반상 정도는 대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머니의 지론에 맞춘 밥상을 차려왔다. 그리고 당시에도 할머니는 그런 밥상을 아주 잘 드시고 계셨는데, 갑자기 아빠는 라면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라면을 이용해 아빠의 신격화, 엄마의 노예화에 이용하시다가 손녀딸의 거친 공격에 주저앉으셨던 것이다.


어제 하루 종일 나는 기분이 별로였던 것이 대꾸를 하는 바람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고, 내가 또 나댔다는 생각, 성격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계속 엄마의 말이 맴돌았다. 어찌보면 나는 항상 엄마가 하던 말인 "너 네 할머니 같다"는 말에 매여살고 있는 것 같은 게 항상 이렇게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아서인 듯하다.10대 시절을 옭아맸던 말인데, 20대인 지금도 이 말에 여전히 이 말에 잠식되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제쯤 이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더 나이가 들어야 할까 아니면 다시 태어나야 할까.

내 인생을 회고해보자면, 내가 이렇듯 까칠하게, 인간 관계에 계산적이게 된 것은 모두 이 말에서 비롯되었다. 더 이상 그 말을 좀 안 들어보기 위해서,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애정을 구걸하는 할머니처럼만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의 10대 시절의 신조가 20대의 나를 붙잡고 안 놔주고 있는 것 같다.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칠수록 왜 더 당신의 아바타가 되는 것 같을까

당신을 싫어할수록 왜 더 당신과 닮아가는 것 같을까

당신의 단점이 나에게 전염된 걸까 아니면

당신의 망령을 붙잡고, 난 아직도 13세의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당신은 형태가 없는 나의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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