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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Oct 18. 2021

사물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바이올렛 에버가든(2018)

분명히 이름이 있지만 전쟁 살상 무기 혹은 한 군인의 개로 불리는 여자.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길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 모른채.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주던 길베르트 소령을 애타게 찾는다. 그녀에게 삶이란 곧 임무 완수와도 같은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기다리던 길베르트 소령은 오지 않고, 별안간 그의 친구라는 사람이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주고, 직업까지 주어가며, 보살펴준다. 하지만 그녀는 편지 대필 사업의 일원인 자동 수기 인형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에게 명령을 내려주던 길베르트 소령이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인 "사랑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동 수기 인형이란 진짜 인형이 아니라 문맹률이 높던 시기에 편지를 대신 써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1.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눈 앞에서 사랑고백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여자가 과연 다른 이들의 감정을 전달하는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일찍이 부모를 잃고, 취급받고, 누군가를 보호하지 않으면 쓸모 없는 전쟁 도구로 취급받았던 그녀는 사람들이 하는 말 이면에 담긴 감정적 행간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저 철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다른 이의 감정을 읽는 것은 훈련받을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감정 교류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 이해하게 되는 일종의 성장 드라마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저주에 지나지 않음을 방증하듯이.


그녀는 그저 감정을 머리로만 이해할 뿐 느낄 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너무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언행은 그녀를 상대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교묘히 숨기기 위해서 진심과는 상반되게 아닌 척을 하기도 하면서 솔직해지지 못하는데, 그녀는 사실만을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그녀에게서 위안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그녀의 다른 이의 감정 따윈 고려하지 않는 듯한 직설적 언행은 악의를 담고 있지 않았기에 솔직함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던 직설적 솔직함은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이들이 생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가끔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남을 상처주지 않기 위해 돌려말하는 것보다는 악의 없는 솔직함도 먹힐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솔직함이 비아냥으로 혹은 누군가에겐 눈치없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할 테지만.


2. 로봇이 아니에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점점 편지를 대필해주는 자동 수기 인형이 되고,  다른 이들의 감정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가슴 깊이 공감해 주고 나서부터 그녀는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죽여왔던 살생의 현장을 다시 되돌아보고,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처절한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본인만 모르고 있었던 바이올렛의 정인인 길베르트 소령의 죽음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정서적으로 무너진다. 인생에서 한 번도 미워한 사람도, 사랑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살아온 그녀가 드디어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게 되는데, 정작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그녀가 사랑해온 사람은 죽었음을 깨달았고, 그 사람을 지켰어야 했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오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핏기 없는 인형 같은 삶을 살던 그녀가 진정한 사람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라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결국, 인간과 사물을 가르는 기준은 감정의 유무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하지만 그 감정에 대해 느끼고, 이해하는 것도 결국 누군가에 의해, 교육에 의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길베르트 소령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 줄 생각까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무감각함이 그저 그녀의 성격적 특성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그녀를 처음부터 수단으로 대우하진 않았지만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그녀의 삶이 이미 수단으로써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는, 목적으로서의 삶에 대해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총평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감정이란 뭘까 깊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바이올렛의 성장 스토리를 지켜보면서 나는 또 나 자신을 반추한다. 일본에서 상도 받은 애니메이션이라던데, 인간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담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은 작화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상에서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흔적이 느껴진다.


나는 항상 무던해지려고 노력하는데, 너무 기뻐하다가도 오버하진 않았나 항상 염려하고, 슬퍼하다가도 너무 깊게 슬픔을 파고들진 않았나 그것조차 염려하곤 한다. 결국 무던해지려고 노력하나 매 순간 무던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 부분이 나의 이상한 성격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 시리즈를 보고 나니, 생각보다 나의 감정적인 모습은 그냥 당연한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당연하게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누르려고 했다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렛이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비로소 인형에서 진정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나도 그저 사람이라는 것을 매 순간 증명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 상황에서는 특히 나의 사람다움을 표출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바이올렛을 보고 있자니, 나도 내 감정들과 좀 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자신의 과거에 직면하는 데에 자신의 감정이 동반된 것처럼,  내가 무던해지려고 어떤 감정적 메시지를 찍어눌렀던 것일까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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