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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Apr 01. 2020

주디와 마츠코의 평행이론

영화 주디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공통점

오즈의 마법사의 그늘에서 벗어난 40대 주디 갈란드의 삶은 결코 환상의 세계는 아니었다. 오즈의 마법사는 그녀의 커리어에 큰 빛이 되어 주었지만 그녀의 삶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의 시발점이었다. 메이어 사의 성 착취, 지나친 다이어트 요구, 마약, 수면제의 남용 등으로 그녀는 도로시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9년에 개봉한 르네 젤위거 주연 영화 "주디"는 도로시가 만들어낸 눈부신 어둠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주디 갈란드의 마지막을 조명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즈의 마법사 속 대사



A heart is not judged by how much you love, but by how much you are loved by others

마음은 네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거야


이 대사는 주디 갈란드의 삶을 관통하는 포인트가 있다. 그녀의 인생은 결코 도로시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캐릭터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주디의 말년을 지탱하던 존재는 그녀의 자식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녀를 따라 공연을 하던 고단한 삶에 지친 나머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한다. 이 사건은 주디가 집착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아이들과의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을 짓밟게 된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젊은 날 속에서 그녀에게는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다고 하는 남자들도 그녀를 일종의 돈, 상품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순수하게 사랑받지는 못했다. 그녀가 받을 사랑은 그녀의 상품성과 결부되지 않고는 가능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재능은 그렇게 그녀에게 필요악이었다. 그녀의 재능으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줄 사람은 얻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함께 일하던 로잘린이 그녀를 가장 아끼던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 주디의 인생과는 비슷한 듯 다른 인생을 산 일본 여인이 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의 마츠코는 끝까지 그녀를 사랑해줄 사람들을 찾아 방황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사랑 찾다가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오순도순 자신과 함께 살아주고,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a love of life을 찾기 위해 교사였던 그녀가 창녀도 되었다가, 사람까지 죽이기까지 한다.


인생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뭘 받았는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뭘 주었는가로 정해지는 거야.


주디나 마츠코에게 마지막까지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오손도손, 다정다감한 삶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사랑받기 위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후회 없이 사랑했다는 점도 같다. 마츠코가 남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것도, 주디가 끝까지 무대를 쉽사리 떠날 수 없었던 것도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츠코와 주디의 차이점이 있다면 주디는 인생의 정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랑받는 느낌을 받지 못해 불행했지만 마츠코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계속 버려지더라도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주디는 평생 화려해보이는 삶을 살았음에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무대에게조차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지만 마츠코는 사랑에 목마른 나머지 가난하고, 추한 삶을 살았을지언정 그녀가 준 사랑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을 남겼다. 그녀의 바보같아 보일만큼 맹목적인 사랑은 추한 삶을 살아갔어도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 결과로  치환된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류와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안타깝고, 가족들과 현실에서 화해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빛나는 삶을 살았지만 인생은 끝까지 외로웠던 주디 그리고 외로운 시궁창을 걸었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주위 사람들이 많았던 마츠코 둘 다 사랑받는 것이 중요했지만 한쪽은 사랑받기 위해 약, 예민함에 기대야 했다면 한쪽은 사랑받기 위해 바보 같아 보여도 더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걸 보면서 그녀들이 남에게 사랑을 구걸할 시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면 결과가 달랐을까 싶다. 왜 이들이 그렇게 불나방처럼 다른 이들의 애정을 갈구했던 걸까 고민하다 보면, 자신을 이 애정결핍에서 구원할 사람을 계속 외부인에게서 찾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구원자는 본인이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저 두 사람의 인생이 한없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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