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1월 처음 시작한 잉글랜드의 FA컵, 열다섯 팀이 참가했었다. 대회 규모는 꾸준히 커졌다.
1883년 대회에서는 전국에서 백 팀이나 참가한다.
이는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만든 경기 규칙을 클럽들이 수용했다는 의미다.
협회는 클럽팀의 대회 참가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더 많은 팀이 참가할수록, 협회가 만든 규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일이었다.
FA컵은 협회가 만든 축구 규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축구 저변 확대'에 기여한 대회였다.
축구 저변이 꾸준히 확산하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일부 클럽 팀이 대회 성적을 위해 실력이 뛰어난 선수를 암암리에 영입하기 시작한다. 웃돈까지 주면서. 부정선수였다.
아마추어 정신에 입각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돈이 오가는 축구의 상업화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축구 인기는 계속해서 커져만 갔고 "상대 팀이 부정선수를 섞어 경기를 뛰었다."는 신고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협회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1885년 7월, 부정이었던 '직업 축구선수'를 제한된 조건으로 허용한다.
스코틀랜드 출신 퍼거스 수터(Fergus Suter)는 잉글랜드 최초, 세계 최초 직업 축구선수로 꼽힌다. 석재를 다루는 노동자였던 그는 블랙번 로버스(Blackburn Rovers) 소속으로 FA컵 3연패(1884~1886)를 이끈다.
새롭게 생긴 직업, 축구선수의 빼어난 활약은 당연했다.
직업 선수가 합법화하면서 팀들이 맞붙는 경기 수준도 점차 높아졌다. 경기장으로 축구팬들이 몰려들었다.
팬들은 경기를 보기 위해 비용 지불도 마다하지 않았다. 축구 상업화가 활발했던 잉글랜드 북부와 중부 지역 클럽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 "돈이 되네?"
클럽팀들의 경기 수준이 높아지면서 FA컵 인기도 자연히 높아졌다. 경기는 상업성이 있었지만 FA컵 대회 방식은 문제였다. 토너먼트 방식의 FA컵, 경기에 지면 곧장 대회가 끝났다. 탈락은 곧 수익 창출 기회가 사라짐을 의미했다.
이에 북부 클럽은 일정한 수익을 보장하는 운영 방식을 고민한다. 리그(League)라는 형태가 이들 눈에 들었다.
1888년 9월,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 열두 개 클럽이 힘을 모아 세계 최초 축구 '프로리그', 풋볼리그(The Football League)가 탄생한다.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주관하던 FA컵 이외에 새로운 축구대회가 생겨났다.
협회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프로리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협회는 공생을 택했다.
프로리그는 클럽팀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대신 규칙은 축구협회 방식을 따랐다.
지금이야 당연해 보이지만 축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축구와 럭비가 갈라졌었다. 다른 길을 택한 럭비도 프로화 과정을 겪었는데, 결국 규칙이 나뉘었다. 기존 럭비 풋볼 유니온은 15명이 경기를 하지만 새롭게 생긴 럭비 리그(Rugby League)는 13명이 한 팀으로 경기하는 등 인원수부터 다르다. 럭비의 규칙 통합 실패는 세계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호주, 아일랜드 등 럭비를 즐기는 국가들의 럭비리그를 보면 유니폼, 장비, 경기장 규격, 규칙 등이 조금씩 다른 걸 확인할 수 있다.
축구는 프로리그 창설 과정에서 규칙을 하나로 유지할 수 있었다.
기존 FA컵과 새롭게 생긴 프로리그는 '호환성'을 갖추게 됐고,
축구팀들은 FA컵에도 프로리그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규칙의 호환성은 오늘날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스포츠에 있어서 '규칙'이라는 속성은, 이렇게나 결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