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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피 Sep 10. 2023

신조어로 맛보는 새로운 단맛

'단맛'과 관련된 한국어 신조어

몇 년 전 '물, 불, 꿀' 등의 말이 마치 접두사처럼 사용되며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내는 현상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물수능, 불수능'이라든가, '물경력'이라든가, '불닭'이라든가, '꿀알바, 꿀팁'이라든가 하는 신조어들 말이다. 어쩌다 이런 말들을 쓰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다가 이 말들은 결국 특정한 '맛'이 가지는 이미지를 따 온 은유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물'은 싱거운 맛, '불'은 매운맛, '꿀'은 단맛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물, 불, 꿀' 외에도 '맛'과 관련된 새로운 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각과 관련 없는 상황에서 맛을 표현하는 동사나 형용사가 사용되거나, 새로운 단어 또는 구 단위의 표현이 생겨나 쓰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주로 단맛과 매운맛에 관련된 표현들이 가장 많은 것 같고, 싱겁거나 순한 맛, 짠맛, 또는 '맛있다/맛없다' 자체나 '먹는다'는 행위와 관련된 표현들도 종종 발견되는 듯하다.


그런 말들 중에는 맛별로 예전부터 이어져 온 이미지 그대로인 것도,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된 것도 있는 것 같다. 모든 표현을 한 글에 다루기에는 많은 것 같아 일단 이번 글에서는 먼저 '단맛'에 집중해 보자.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새로운 '단맛' 표현들과 그 의미, 간단한 예를 정리해 보았다.


1. 접두사

꿀-

- 주로 '이득이 되는', '쏠쏠한', '편한'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예) 꿀알바, 꿀팁, 꿀이득, 꿀보직, ...


2. 명사

- 주로 '꿀이다'의 형태로 사용되어, 접두사 '꿀-'과 비슷한 의미를 표현한다.

예) 그거 완전 꿀이네!


단짠, 단짠단짠

- 단맛과 짠맛의 조화, 또는 단 음식과 짠 음식을 번갈아 먹는 데서 나온 말로 지금도 주로 실제 맛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나, 간혹 다른 명사 앞에 붙어 '즐거움도 있고 고충도 있는'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관형사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용례를 면밀히 분석한 것은 아니어서 일단 명사로 분류)

- 기존의 '달콤 씁쓸하다'는 표현과 비슷한 듯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 '짜다'가 '짠하다, 슬프다'의 의미를 얻게 되면서 '단짠'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짠맛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기로...)

예) 단짠 로맨스, 단짠단짠 스토리


3. 형용사

달다, 달달하다

- 크게 '로맨틱하다', '행복하다'와 '쏠쏠하다'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달달하다'는 표준어가 아님에도 이미 매우 널리 쓰이는 신조어가 되었다. 그냥 '달다'보다는 은은한 느낌이 있다. '달콤하다'와 비슷한 듯 다른데 나중에 제대로 예문 비교를 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 그냥 '달다'보다는 '달달하다'로 사용되는 빈도가 높은 느낌이다.

- '로맨틱하다', '행복하다'의 의미는 사실 '달다'의 새로운 의미로 볼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달콤한 사랑', '달콤한 인생'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단맛은 이미 로맨틱하고 행복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내 직관상 주로 '달콤하다'가 사용되어 온 상황에서 그냥 '달다' 또는 '달달하다'가 사용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 '쏠쏠하다'의 의미는 그동안 단맛보다는 짠맛의 이미지였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사용된 표현이 '짭짤하다'였기 때문이다. '달다, 달달하다'는 표현은 '짭짤하다'라는 표현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는 것 같고, 사용 가능한 맥락이 조금 다른 듯하다.

예) (로맨틱한 장면을 보고) 달다, 달아!

예) 수익이 달다/달달하다, 달달한 주식, 달달한 저작권료, ...


4. 구 이상의 표현

꿀(을) 빨다

- '들이는 노력에 비해 큰 이득을 얻는다', 또는 '편한 일을 맡는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 위에서 언급한 접두사 '꿀-'이나 명사 '꿀'의 의미에서 나온 표현인 듯하고, 반드시 '빨다'라는 동사와만 공기하는 특징이 있다.

예) 일이 편해서 나는 꿀 빨았지.

예) 조별 과제인데 혼자 아무 일도 안 하다니, 쟤 꿀 빠네!


이 썩는다, 충치 생길 것 같다, 당뇨 올 것 같다, ...

- 로맨틱한 상황을 보았을 때 쓰는 말들로, 모두 '달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단것을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긴다거나, 당뇨는 혈당 수치가 높아지는 질환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사용되는 것 같다.

- 다른 표현에 비해 다소 과격한(?) 감이 있어 실제 대화에서보다는 주로 인터넷이나 sns에서 많이 사용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나온 표현들을 통해 '단맛'의 이미지를 추출해 보자.


첫 번째로는 기존의 단맛도 가지고 있던 이미지, 즉 로맨틱하거나 행복하고 즐거운 이미지가 있다. 다만 전에는 같은 상황에서 '달콤하다'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최근에는 그냥 '달다'가 사용되거나 '달달하다'라는 신조어가 사용된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이 썩는다, 충치 생길 것 같다, 당뇨 올 것 같다' 등의 돌려 말하는 표현들이 새로이 사용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득'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에는 '짭짤하다'로 주로 표현이 되었던 상황들이 최근에는 '꿀'이나 '달다, 달달하다'로 표현되곤 한다. 다만 '짭짤하다'와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 '짭짤하다'를 밀어내는 느낌은 아니다. '짭짤하다'와 '꿀, 달다, 달달하다'는 모두 실속이 있고 이득이 있음을 나타내지만, '짭짤하다'는 이득의 존재 자체에 주목한다면 단맛 표현들은 들인 품에 비해 돌아오는 이득이 크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단맛 표현들이 단순히 '이득이 되는' 상황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편한, 어렵지 않은' 일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점(꿀알바, 꿀보직 등)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예전의 '꿀-'에는 성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요즘의 '꿀-'에서는 그런 의미를 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꿀-'이 들어간 첫 신조어는 '꿀벅지'였는데, 이 말은 '꿀을 바른 것처럼' 탄탄한 허벅지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혹은 '꿀처럼 달콤한 허벅지'라는 의미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왜 하필 '꿀'이 들어가게 된 건지 아직도 의아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기원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단어는 주로 여성 연예인들의 몸매를 품평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회적 분위기에 변화가 생긴 탓인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꿀-' 신조어에서는 이런 의미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정리하자면 신조어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맛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나, 들인 노력에 비해 과분한 이득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후자의 이미지가 부각되면 단맛 표현은 비꼬는 의미로도 사용 가능해진다. '달콤 씁쓸하다'와 비슷한 의미로 '단짠, 단짠단짠'이, '짭짤하다'와 비슷한 의미로 '달다, 달달하다'가 사용된다는 점은 어떤 맛의 이미지가 다른 맛으로 옮겨왔거나 두 개의 맛이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콤 씁쓸'과 '단짠'은 사실 쓴맛과 짠맛의 의미 문제이므로 단맛과 큰 관련은 없지만...)


신조어는 그 기원도 의미도 사용되는 환경이나 맥락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말을 얹기 조심스러운 영역이다. 용례를 면밀히 살피지 않았으므로 내가 놓친 부분이 당연히 많을 텐데 독자 분들이 너그러이 읽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혹시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미처 다루지 못한 단맛 표현이 있다면 어떠한 지적이든 '달게' 받아들일 의향이 있음을 밝힌다!


덧붙이는 말.

'꿀피부'와 같은 말도 자주 사용되지만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꿀피부'는 '꿀'의 단맛에서 파생된 표현이 아니라 마치 꿀을 바른 듯 윤기 나고 매끄러운 피부를 일컫는 말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꿀벅지'와 그 유래가 비슷한 것도 같은데, 다만 '꿀피부'에서는 '꿀벅지'의 성적인 의미가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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