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스리랑카 꿈 백화점

아이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있는 곳

by 꽃보라 꽃목수
Prologue


얼마 전, 한 소설이 내 마음을 설렘으로 채웠다. 잠든 사람들에게 꿈을 판매하는 신비로운 공간, '꿈을 파는 백화점'을 소재로 한 이야기였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꿈을 살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꿈, 할머니를 추억하는 꿈, 스타가 되는 꿈, 좋아하는 사람이 나오는 꿈, 타인의 삶을 체험하는 꿈... 그런 일들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생각하며 푹 빠져 읽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스리랑카의 바닷가 마을의 작은 학교를 떠올렸다. 국제구호단체 코인트리가 운영하는 마을 유일의 학교. 그곳에서 하루하루 자라나고 있는 우리 아이들 말이다. 깔깔대며 옆자리 친구와 장난치다 선생님한테 혼나는 아이,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에 늦는 아이, 고기잡이에 나가느라 결석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 이 아이들은 매일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매일 바다를 보며 자란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학교 설립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더 넓고 밝은 환경에서 더 행복한 꿈을 품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특히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편안하게 학교생활을 즐기며 함께 웃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길 소망한다. 오랜 시간 준비한 끝에 우리는 새 학교를 세울 부지를 마련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지금은 빈 땅인 그곳에 서서, 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 학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원하는 꿈을 살 수 있는 백화점처럼 마법 같은 공간을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닷속 깊은 곳의 보물을 찾아내는 꿈, 작은 텃밭에서 무지개색 꽃을 피우는 꿈, 새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구름 위에 집을 짓는 꿈처럼 환상적이거나, 아니면 아픈 동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꿈, 매일매일 학교에 갈 수 있는 꿈처럼 소박하거나... 아이들이 원하는 그 어떤 꿈도 꿀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게도 마법 같은 힘이 있다면 꼭 그런 곳을 만들어 주고 싶다.









'바다의 진주'라고 불리는 섬마을.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아침에, 나는 '꿈 백화점'이란 건물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름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건물 입구에 붙어 있었다. 건물 둘레를 따라 피어난 '꽃'들은 이름 모를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황금빛 쟈스민, 진홍빛 히비스커스, 새하얀 연꽃까지, 마치 무지개가 땅에 내려앉은 듯했다. 그 꽃들은 때로는 바람에 살랑이며 춤을 추고, 때로는 건물을 지키는 듯 고요히 서 있었다.


건물 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행복한 웃음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바다 너머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 평온한 이 순간,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꿈 백화점. 내가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내 발걸음은 마치 수없이 드나들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 건물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문 앞에 다다른 순간 건물 뒤편에서 갑자기 자전거가 떼로 나타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자전거가 여러 대인 게 아니라 하나의 자전거에 안장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 없는 뒤쪽 안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맨 앞에만 한 노인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바퀴자국을 따라 모래먼지가 자욱해졌고, 그 사이로 어디선가 나타난 개와 고양이들이 자전거의 뒤를 밟았다. 나는 그 광경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시 건물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1층 입구의 문은 열려 있었다. 입구 안쪽으로는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책들이 가득 진열된 공간이 펼쳐졌다. 한쪽 벽에는 배인지 비행기인지 모를 모형들이 걸려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바닷속 보물을 찾는 데 쓰였을 법한 도구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신기한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 한편에 보란 듯이 나타난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 위쪽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향기가 마치 나에게 올라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얀 백사장 뒤로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왜 이 섬마을이 '바다의 진주'라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은 바다 끝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온 것이었지만 이 공간을 온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차림의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에서 점장이란 글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친근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이들은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설렘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늘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조금 의아했다. 오래 기다렸냐니, 나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을 뿐인데 말이다.


"혹시... 제가 오기로 했었나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모든 분들은 이곳에 언젠가 오기로 약속하셨어요. 다만 그때를 정하지 않았을 뿐이죠."


수수께끼 같은 말에 질문을 달기도 전에, 그녀는 벽면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가리켰다. 그것은 이곳 섬마을과 바다를 나타낸 지도처럼 보였는데, 곳곳에 반짝이는 작은 조개들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조개 하나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빛이 퍼져나갔고, 공기 중에 희미한 이미지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이곳은 꿈 백화점이라 불리지만, 사실 꿈을 파는 곳은 아니에요. 꿈은 판매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여기엔 단지 다양한 가능성이 진열되어 있을 뿐이죠. 아이들은 그저 이곳을 거닐며 자신에게 끌리는 것을 발견해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돼요. 마치 피팅룸에서 옷을 입어보고, 시식코너에서 맛만 보는 것처럼요."


그녀의 말이 끝나고 창밖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바로 창가로 다가가 나에게 손짓했다.


"이제 아이들이 오네요."


나는 창가로 다가가 그녀의 옆에 섰다. 해변에서 걸어오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상하게 어딘가 익숙했다. 그런데 아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완벽한 어른의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저분들이... 아이들인가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녀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아이들이라고 불렀으니까요. 너무 커버려서 조금 놀라셨나 봐요."


키가 초등학생만큼 작지만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젊은 남성이 맨 앞에 있었다. 그는 내게 손을 흔들었고, 나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자스!" 그녀도 그에게 반갑게 소리쳤다.


"이자스는 아이들이 작은 키로도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멋진 사람이 됐어요. 아이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도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곳의 일을 돕고 있죠."


그때 창문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보았던 그 기묘한 자전거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빈 안장이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밟는 노인 뒤로 십 수 명의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이번엔 '아이'라고 부를 만한 아이들이었다. 자전거가 건물 앞에 멈추자, 아이들은 떼를 지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서 와!" 점장이 창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아이들은 웃음소리와 함께 건물로 향했다. 그들은 서로 밀치고 당기며 경쟁하듯 입구로 들어갔다. 1층에서 우르르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다가 곧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도와줘요, 너무 높아요!"


몇몇 아이들이 계단을 오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또래보다 키가 작은 아이들은 높은 계단을 하나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자스는 내게 힐끔 미소를 보내고는 재빨리 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벽 한쪽에 걸려있는 오래된 나무 손잡이를 당겼다. 그러자 계단의 모서리마다 구름같이 생긴 발판들이 튀어나왔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구름 발판을 밟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구름은 포근해 보였지만 아이들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했고, 아이들의 체격에 맞춰 살짝살짝 반동을 주면서 더 쉽게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자 점장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자스가 만든 거예요. 자신이 경험했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계단을 오르던 한 아이가 몸을 돌려 이자스에게 외쳤다.


"이 구름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어요?"


이자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낄 때까지."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구름 발판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얼굴에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자스도 아이들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 2층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질문 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곳곳을 둘러보며 신기한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2층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한동안 파묻혀 있었다. 잠시 뒤 점장이 1층에서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밑으로 내려가니 아까 아이들을 태우고 왔던 기묘한 다인승 자전거가 또 어딘가 갔다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린 노인은 뒤에 탄 아이들을 내려주고는 한숨도 쉬지 않고 다시 출발했다. 자전거가 가속하며 만든 바람이 어찌나 힘찼는지 주변의 꽃잎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 광경을 본 한 아이가 소리쳤다. "'꽃바람'이 불고 있어요!"


"그래서는 만찬 전까지 아이들을 다 못 실어 오겠어요!"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점장이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 '다르니카'가 왔네요."


나의 등 뒤로,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삼륜차 한 대와 자주색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서있었다. 그녀의 삼륜차는 일반적인 차량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작은 스포츠카처럼 특별히 낮춰진 차체는 지면을 거의 스치듯 달릴 수 있을 것 같아다. 겉으로 보이는 엔진은 일반 삼륜차보다 훨씬 좋아 보였지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약간의 소리마저 차 안에서 들려오는 동요 같은 음악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나에게 짧게 눈인사를 건넨 후 점장에게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별로 없어." 다르니카가 말했다.


"파우신 오빠의 점심 만찬까지 아이들이 도착해야 해. 빨리 데려오지 않으면 맛있는 걸 다 놓칠 거야!"


"그럼 서둘러야겠네." 점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니카가 삼륜차의 앞바퀴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살살 털어내더니 바로 출발하려는 듯 올라탔다. 그녀의 손길이 핸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모습이 마치 소중한 가족을 대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자, 다르니카가 진지한 얼굴을 풀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기억나세요? 내가 다섯 살 때 이 동네 삼륜차들 사이에서 온종일 뛰어다녔잖아요. 운전도 못하면서 핸들만 돌리고 하루종일 놀았지. 동네 어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쳐도 절대 안 내려왔잖아요."


점장이 다르니카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때도 지금처럼 고집이 셌구나."


"그랬지." 다르니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었다면 아빠가 있는 곳까지 달려갈 수 있었으려나?"


다르니카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활기찬 소리로 나와 점장을 바라보면 말했다.


"뭐, 지금 내가 달려야 할 이유는 많으니까." 다르니카는 말을 마치는 동시에 삼륜차의 시동을 올렸다. 그 순간 시트가 그녀의 체형에 맞춰 스스로 조절되는 듯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금방 돌아올게요! 파우신 오빠의 스테이크 소리를 놓치면 안 되니까!"


그녀의 삼륜차가 순식간에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뒤로는 마치 무지개처럼 빛나는 희미한 궤적이 잠시 남았다가 사라졌다. 점장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게 미소를 지었다.


"다르니카도 출발했으니 곧 아이들이 모두 도착할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제 3층으로 올라가 볼까요? 파우신 오빠가 한창 점심 만찬을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점장과 함께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2층을 지나면서 여전히 까르르 대며 웃는 아이들과 그 사이에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이자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장면이었다.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궁금해서 아이들과 이자스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마침 3층에서 내려오고 있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넓은 어깨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의 소매는 제멋대로 접혀 있었고 가슴팍에는 음식물로 보이는 얼룩들이 보였다.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하고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드난!" 점장이 반갑게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파우신 오빠 쪽 준비는 잘 돼 가고 있어?"


아드난이란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점장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드난은 여전히 말이 많지 않아요.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죠. 아드난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면, 음..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분명히 답을 알려줄 거예요."


또 한 번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아드난이 갑자기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꽉 잡더니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나를 끌고 올라갔다. 그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냥 그에게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는 여전히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솜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서 싫은 기분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잠시 1층에 볼일이 있어서요!" 점장이 말했다.


"아드난과 함께 가세요. 파우신 오빠의 세계로 안내해 줄 거예요."


점장이 내려가자 나는 아드난과 단둘이 남겨졌다.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얼굴에는 읽을 수 없는 표정뿐이었지만, 걸음은 묵직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계단이 끝나갈 무렵 그가 멈춰 섰다. 나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없어서 긴장했다. 아드난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조개껍데기 하나를 꺼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조개껍데기를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작지만 완벽한 형태의 그 조개는 햇빛에 무지갯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드난은 잠시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가, 내 시선과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 주는 거야..?" 내가 물었다.


아드난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가 조개껍데기를 가리키며 입술을 열었다. 내가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어서 그는 천천히 조개껍데기를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는 동작을 했다. 나도 조개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대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었다. 아드난. 나는 그것이 아드난의 목소리임을 직감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챈 걸까?


"아드난, 이거 네 목소리지?"

내가 말하자 아드난의 무뚝뚝한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조개껍데기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일지 제대로 들어보려고 귀로 다시 가져갔다. 그런데 아드난이 내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엉거주춤 3층 안으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3층에 도착하자 주방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와 함께 향긋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드난은 내 손을 놓고 주방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잠시 후, 그가 작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생과일이 올라간 작은 과자 하나와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아드난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내게 건넸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즙과 바닐라의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맛있어!"


정말 맛있어서 나온 소리였다. 그때 주방에서 누군가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드난! 이것도 가져가야지!"


아드난은 그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를 힐끗 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주방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번에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3층은 넓은 공간이 식당처럼 꾸며져 있었다. 창가 쪽으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이 줄지어 있었고, 벽에는 다양한 음식과 향신료를 소개하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특히 어떤 과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손바닥 만한 보라색 과일의 홍보 포스터가 많이 걸려 있었다. 세계적인 방송사들과 인터뷰한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모든 포스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양손에 과일을 한껏 들고 인심 좋게 웃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얼굴이 낯익다. 그만큼 유명한 사람인 걸까?


주변에서 갑자기 과일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향기에 이끌려 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포스터에서 봤던 그 사람이 포스터에서랑 똑같은 웃음을 짓고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보랏빛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망고! 맛있었죠?"


그녀가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오며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이게 망고라고?


"아니, 아드난 보고 망고 타르트를 대접해 드리라 했더니 한 조각만 가져갔더라구요! 쟤는 예나 지금이나 손이 작아서 탈이야. 한 조각으로 누구 코에 붙이겠어요. 안 그래요? 그래서! 제가 망고를 더 가져왔죠! 이 망고 딱 보면 아시겠지만 진짜 달아요.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을 거예요. 이걸 맛 보여 드릴 날을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구요!"


그녀는 바구니에서 가장 커 보이는 망고 하나를 집어 숙련된 솜씨로 깎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망고 한 덩이가 여러 개의 큐브로 변했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색깔이 진한 한 조각에 포크를 찍어 나에게 건넸다. 내가 먹어본 망고, 아니 모든 과일 중에 가장 달콤한 맛이었다. 한 조각을 더 집어 먹으려는 찰나 불현듯 '이거 공짜 맞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나는 입에서 흘러내리려는 보랏빛 과즙을 후룹 후룹 들이마시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이거 공짜인가요..?"


그녀가 콧바람을 풉 하고 내뱉더니 거의 뒤로 넘어가는 자세로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여기서 돈 내야 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백화점이래서 돈 내는 걸로 생각하신 거예요? 아니, 백화점에도 시식코너는 있잖아요!? 아까 우리 언니 만난 거 아니었어요? 언니가 아무것도 말 안 해줬나? 근데 이 언니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이제 만찬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무튼 공짜예요 공짜! 그러니 맘껏 드세요! 바구니에 있는 거 다 드셔야 해요! 아니지, 그럼 배가 불러서 파우신 오빠의 요리를 못 먹으려나? 아냐 아냐, 과일 배는 따로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일단 다 드세요!"


그녀가 말을 폭풍같이 쏟아내서 나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너무 없던 아드난 뒤에 만난 사람이라 정신이 더욱 혼미해졌다. 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특이한 색깔의 망고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 이 상황, 이 느낌... 나는 이것을 위해 여기를 찾은 것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결국 그 많던 망고를 다 먹어버렸다. 조금 있다가 만찬이라던데, 음식 맛이라도 볼 수 있을까란 걱정이 들었다. 내가 힘겨운 듯 포크를 접시 위로 톡 내려놓자마자 그녀가 소리 질렀다.


"쩔어!"


뭐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내가 고향에서 친구들끼리 장난칠 때 하던 소리였다. 심지어 지금은 유행이 지나 잘 쓰지도 않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알고 있는 건지 너무 놀랍고 신기했다. 이 섬마을에도 그런 표현이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그녀가 아까 나에게 폭풍같이 말을 쏟아냈을 때도 말투에서 왠지 모를 정겨움이 느껴진 것 같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요? 내가 사는 곳을 잘 알아요? 와 본 적이 있어요?"


그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조용히 가방에서 망고모양의 케이스를 끼운 큼지막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만 보니 핸드폰의 로고도 사과가 아니라 망고였다! 그리고 나에게 영상을 하나 틀어서 보여줬는데, 영상에는 유명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 제목이 '쩔어'였다. 그녀는 그 노래의 가사를 거의 완벽히 따라 부르면서 '쩔어'하는 부분에서 한 번 더 따라 외치고는 나에게 물었다.


"이 표현, 이럴 때 쓰는 거 맞죠?


나는 흐뭇한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맞다고 대답했다.


"완전 쩔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녀가 양손을 추켜올리며 환호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멀리 떨어진 섬마을에서 내 고향의 유행어를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망고 어땠어요? 맛있었어요?" 그녀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정말요. 제가 먹어본 과일 중에 제일 달콤한 맛이에요. 그리고 망고가 보라색도 있다니 처음 봤어요. 너무 신기해요." 내가 답했다.


"제가 직접 개발한 품종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마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이 가수, 상징색이 보라색이에요. 그래서 보라색 망고를 만들고 싶었어요. 저도 팬이거든요. 5년이나 걸렸지만, 드디어 성공했죠. 예이! 근데 이거 니한테는 비밀이라 절대 얘기하면 안 돼요. 언니는 다른 가수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신의 보라색 원피스를 자랑스럽게 펼쳤다.


"오늘도 제가 입은 원피스 색깔도 너무 이쁘죠? 특별한 사람에게 드디어 제 특별한 망고를 소개하는 날이니까 특별히 장만했답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설명에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특별해요..."


그때 마계단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미라! 여기 있어?" 점장의 목소리였다.


'아미라'. 나는 이 망고 아가씨의 이름이 아미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이어 점장이 3층으로 올라와 우리를 발견했다.


"여기 계셨네요. 아드난이 안 보여서 찾고 있었어요. 망고는 벌써 다 드셨네요."


점장이 다가오며 웃음을 지었다.


"언니! 망고 완전 맛있어. 올해는 작년보다 더 달콤해!"


아미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점장이 아미라의 언니였나 보다. 둘이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달라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점장이 내게 말했다.


"아미라 덕분에 이곳의 모든 아이들이 질 좋은 망고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너무 비싸서 아이들이 먹기 힘들었는데 말이죠. 이제는 오히려 망고가 질린다고 안 먹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예요."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망고 생산지인데도 망고를 먹지 못한다는 게 어렸을 때는 너무 슬펐거든요." 아미라가 덧붙였다.


점장이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아미라가 망고 핸드폰의 시간을 나와 점장에게 번갈아 보여주며 말했다.


"이제 곧 만찬이 시간이에요. 아이들이 다 도착했으려나? 제가 밑에서 확인하고 올게요!"


아미라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나와 점장은 창가로 다가갔다. 다르니카의 화려한 삼륜차가 건물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기묘한 다인승 자전거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줄줄이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부터 자전거를 쉴 새 없이 몰던 노인은 이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는, 다르니카와 미소를 주고받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드디어 다 모였네요!" 점장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파우신 셰프의 만찬이 시작됩니다."






때마침 주방에서 환한 미소를 지닌 키 큰 남성이 나왔다. 그는 누가 봐도 셰프일 것 같은 흰 유니폼을 입고 한 손을 가슴에 올린 채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더 다가와 두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입술을 뻥끗뻥끗했지만 소리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수어'로 말하고 있었다.


"파우신 오빠는 들을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최고의 요리사 중 한 사람이 되었죠. '사운드셰프'라고 들어 보셨어요? 음식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요리사죠. 오빠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의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멋진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요." 점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파우신은 점장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래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나는 소리 같았다. 점장은 직접 가서 안내를 해야겠다며 급히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나도 그녀를 거들어야 할 것 같아서 함께 내려가려는데 파우신이 내 팔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서글서글한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 손으로 무언가 한 마디를 얘기하고는 그 큰 팔로 나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그의 품이 너무 포근해서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애틋했다. 그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든, 지금은 나도 팔을 들어 그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파우신이 포옹을 풀었을 때 나는 나의 어깨가 조금 젖어있음을 알게 됐다. 잠시 뒤 그는 나에게 수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짜고짜 손을 휘두르며 그에게 무슨 말이냐고 질문을 시도했다. 하지만 나의 말을 파우신에게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그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주방 뒤편에서 눈만 내밀고 있는 아드난과 눈이 마주쳤다. '쟤는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세히 보니 아드난이 망고 껍데기를 돌돌 말아 자기 귓속으로 넣었다 뺐다 하고 있었다. 나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귀? 껍데기? 조개껍데기?! 아드난이 준 조개껍데기가 떠올랐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조개껍데기를 꺼내어 귀에 가져다 댔다. 희미했지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더 잘 들릴까 싶어 본능적으로 파우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 덕분에 어른이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파우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이 나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는지, 여전히 똑같은 수어를 반복해서 나에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지그시 잡아 멈추었다. 그는 수어를 멈추고 내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오늘 아침의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래층에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이들이 올라오는 소리였다. 아이들 행렬 속에서 점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멀리서 파우신에게 수어로 짧게 소통한 후 나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다 도착했어요. 만찬을 시작할 시간이네요. 4층으로 올라가요!"


파우신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다시 수어로 무언가를 표현했다. 이번엔 그의 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마지막 준비를 해야 하니 잠시 후 4층에서 보자는 뜻이었다. 파우신은 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주방 쪽으로 향하는 별도의 계단을 통해 서둘러 올라갔다. 내 옆에 남아있던 아드난이 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함께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에는 이미 아이들이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서로 밀치고 웃고 떠들며 올라가는 아이들 사이로, 이자스가 아이들의 작은 발 앞으로 구름 발판을 내려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기보다 공중에 떠 가는 모습으로 발판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다시 보아도 신기한 장면이었다.


"야, 조심해!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다르니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계단 아래에서 질서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흥을 완전히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점장은 계단 위쪽에서 우아하게 아이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살짝 웃어 보이며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이들의 행렬을 따라 아드난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우리 뒤로 기묘한 자전거를 몰던 노인과 동네 주민 또는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도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향신료 냄새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4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4층은 완전히 또 다른 세계였다. 넓은 공간은 마치 축제 현장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는 형형색색의 등불이 매달려 있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미세하게 움직이며 등대를 연상시켰다. 등불 사이로는 얇은 비단 천이 물결처럼 늘어져 있어 바다의 물결을 실내로 끌어들인 듯했다.


원형으로 배치된 테이블마다 다양한 색깔의 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건물 입구를 둘러싸고 있던 꽃들이었다. 그 꽃들은 장식이라기보다 마치 실내로 초대된 것 같은 느낌을 풍겼다. 몇몇 아이들이 자신들의 테이블에 놓인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꽃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한 작은 여자아이는 자기 얼굴보다 큰 연꽃잎에 얼굴을 살포시 올리고는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 예쁘지? 내 '꽃받침'이야."


가운데에는 파우신이 서는 것 같은 특별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은 마치 바다의 중심, 파도가 모이는 곳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철판과 각종 요리도구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무대 주변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어 요리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가 물 위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조리 도구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무대 뒤에는 싱싱한 해산물과 다양한 열대 과일, 향신료들이 예술 작품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이 신비한 공간에 들어선 이후 탄성을 멈출 수 없었다.


갑자기 공간의 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리고 중앙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며 파우신이 등장했다. 그의 흰 유니폼은 반짝이는 조개껍데기와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 파우신은 두 손을 높이 들어 인사했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파우신의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고기를 자르고, 야채를 썰고, 소스를 휘저었다. 모든 움직임이 정확하고 리드미컬했다.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천장의 조명이 미세하게 반응하며 색을 바꾸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파우신이 스테이크를 굽는 장면이었다. 고기가 뜨거운 철판에 닿는 순간 '지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주변의 물웅덩이에서 물기둥이, 천장에서는 빛의 샤워가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은 마치 자연의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쇼와 같았다.


이 모든 소리들이 하나의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 공간을 채웠다. 철판에서 나는 '지글지글' 소리는 베이스를,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톡톡' 소리는 리듬을, 냄비 속 국물이 끓는 '보글보글' 소리는 멜로디를 담당하는 듯했다. 파우신의 무대는 오케스트라 무대로, 요리 도구들은 악기로, 그리고 파우신은 모든 소리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로 변모했다.


"우와, 정말 음악 같아!" 한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 말에 다른 아이들도 공감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는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소리 같아!"

"나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도 들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들었다고 외쳤다. 자신들이 느끼는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또 다른 아이들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었다.


이자스는 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무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행진했다. 다르니카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지휘자 흉내를 내는 아이에게 아이처럼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아미라는 한 아이와 손을 맡잡고 망고를 두드리며 리듬을 더했다.


요리 퍼포먼스가 절정에 이르자 보조 요리사들이 완성된 요리를 각 테이블에 서빙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음식들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예술 작품 같았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파란빛 소스, 산호초를 닮은 튀김, 파도 모양으로 쌓아 올린 밥까지,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들은 음식이 나오자 환호성을 지르며 맛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특별한 소리가 났다. 바삭한 튀김을 씹을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크게 울렸고, 부드러운 푸딩을 떠먹을 때는 '푸슉' 하는 소리가 났다. 파우신은 무대 중앙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통해 아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온 공간이 웃음소리와 행복한 대화로 가득 찼다. 모든 아이들의 얼굴에는 어둠 한 점이 없었다. 나는 이 순간,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나는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옥상에 올라가면 경치가 더 이쁠 거예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점장이 어느샌가 다가와 나에게 말했다.


"5층 루프탑 테라스요. 거기서 보는 저녁노을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이에요. 잠시 올라가 보세요. 저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게요."


점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즐거운 소음 속에서 아드난도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계단을 향해 걸어가며 뒤돌아보니, 파우신과 아이들이 함께 테이블 위를 두드리며 즉흥 연주를 하고 있었다.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다른 계단들보다 좁고 아늑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갈수록 아래층의 소음은 점점 작아졌다. 계단 끝에 이르자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을 열고 루프탑 테라스로 나섰다.






테라스는 꽃과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정원 같은 공간이었다. 바다와 하늘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테라스에는 이미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뭔가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정확히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고!" 여성의 목소리가 약간 흥분된 듯 들렸다.


"합사,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체계가 필요해." 남성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들은 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카잔, 참 아이러니하네. 예전에는 규칙을 무시하고 항상 자기 마음대로 굴더니 지금은 규칙과 체계를 이야기하니 말이야." 합사라는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잘 알아. 나 같은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인지를. 무질서 속에서는 결국 길을 잃기 쉬워."


카잔이라는 남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의 말에 합사는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그림과 예술 작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아름다운 작품들은 아이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거야. 틀에 갇히면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없어."


"하지만 그 상상력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기본기가 필요해. 너도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교육을 할 수 없었을 거야." 카잔이 차분히 설명했다.


그때 내가 서 있는 쪽의 문이 바람에 밀려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내 쪽을 돌아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합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여기서 만나네요. 루프탑에서 보는 노을이 정말 아름답죠?"


합사의 따뜻한 미소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점장님이 이곳에서 노을을 보라고 권해주셨어요. 실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대화 중이셨는데..."


"아니에요, 전혀요!" 합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당신의 의견도 듣고 싶네요. 저희가 조금 논쟁 중이었거든요."


카잔이 의자를 당겨 나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합사와 저는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저희는 선생님이거든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이들에게 자유가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체계와 규율이 더 중요할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그들의 질문에 일단 대답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테이블에 앉으며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음...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 않을까요?"


합사의 눈이 반짝였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매번 둘 중 하나에 더 비중을 두는 결론이 나는 것 같아요."


"균형이라..." 카잔이 생각에 잠기더니,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합사에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나에게는 뭐라 확신에 차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였지만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들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들의 열정적이고 박식한 대화를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두 분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지금이랑 같은 생각이었나요?"


합사가 아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는 자유로움이 제일 좋았어요. 그래서 미술을 가장 좋아했죠. 상상하는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잖아요."


카잔은 약간 머뭇거리다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마을에서 가장 말 안 듣는 아이였다고 해요. 수업시간에 공부하기 싫다고 책이랑 연필을 집어던지고 다녔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학교에 얽매이는 게 제일 싫었어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말쑥한 카잔과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이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바뀌게 된 거예요?" 내가 물었다.


카잔이 창밖으로 노을이 물든 바다를 응시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어릴 적, 수업을 내빼고 해변가에서 혼자 놀던 날이었어요. 저는 모래성을 쌓고 있었죠. 그때 누군가 내 옆에 조용히 다가와 앉더니 자기도 모래성을 쌓더라고요. 정말 멋진 모래성이었어요. 파도가 들이쳐도 몇 번을 견뎌낼 정도로 튼튼했고요. 반면 제 모래성은 작은 물결에도 흩어져 사라졌죠. 그 사람이 부러워서 물어봤어요. 어떻게 그렇게 튼튼하게 짓냐고.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죠. 모래성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마음대로 쌓으면 재미는 있겠지만 금방 무너진다고 말이에요. 그 말이 왠지 마음속에 오래 남았어요."


합사가 카잔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논쟁은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게 교육의 본질일 거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합사의 말에 카잔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하늘의 색은 더 짙어져 있었다. 때마침 점장이 테라스로 올라왔다. 합사는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하며 인사했고, 카잔은 손만 살짝 들었다 내려놓았다. 점장이 미소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노을이 아름답죠?"


"정말 아름다워요."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점장이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만찬이 거의 끝나가요. 아이들은 곧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낙조의 아름다움과 깊이 있는 대화에 빠져 있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동시에 뭔가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들었다.


"아, 그런데 1층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정말이네요. 그럼 지금 같이 내려가 보실래요? 사실 1층은 제가 특별히 아끼는 공간이기도 해요." 점장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나는 합사와 카잔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둘은 따뜻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당신과의 대화가 정말 즐거웠어요." 합사가 말했다.


"언제든 다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카잔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점장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네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나예요. 제 이름은 아마나입니다."


"아마나..."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니 귀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점점 작아졌다. 4층에서는 파우신의 만찬 파티가 마무리되고 있었고, 일부 아이들은 체력을 다 소진한 듯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3층과 2층을 지나는 동안, 아마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각 층의 공간에 담긴 특별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각 층은 아이들의 다양한 상상력을 키우기 위한 공간으로 설계되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했다.


마침내 1층에 도착하자, 아침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그 공간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오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야 소개해드려요. 꿈의 도서관이에요." 아마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벽면을 따라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장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무수한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침에도 느꼈지만, 특이한 점은 그 책들이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글자와 기호들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어떤 책은 별자리 같은 기호가, 또 다른 책은 물결처럼 흐르는 문양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책들은... 어떤 언어로 쓰여 있는 건가요?" 내가 호기심에 한 권을 집어 들며 물었다.


"그건 꿈의 언어예요. 아직 말로 표현되지 않은 꿈들, 앞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의 언어죠."


아마나는 유리 진열장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노트들이 조심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나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것들은 더 특별해요, 이 노트들은 꿈이 형태를 갖추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거든요."


유리 너머로 노트들을 살펴보니, 처음 페이지들은 도서관의 책들처럼 알 수 없는 기호들이었지만, 놀랍게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기호들이 점점 또렷한 형태의 그림과 글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꿈이 이렇게 모호해요." 아마나가 설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꿈이 구체화될수록,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해가죠."


"이 노트들은 누구의 것인가요?" 내가 물었다.


아마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유리 진열장을 열었다. 그녀는 노트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표지에는 알 수 없는 기호가 새겨져 있었지만, 넘겨보니 마지막 페이지에는 선명한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이자스의 노트예요." 아마나가 말했다.


"11살 때 그는 자신의 키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어요. 처음에는 그저 '크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꿈은 '나와 같은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로 변화했어요."


다른 노트를 꺼내며 그녀가 계속 말했다. "이건 다르니카의 것이에요. 처음에는 '아빠를 만나고 싶다'라는 소망이었어요. 그 후에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다'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 빠르게 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로 발전했죠."


"다른 노트들도 있나요?" 나는 신이 나서 물었다.


"물론이죠." 아마나가 미소 지었다.


"파우신 오빠의 노트는 정말 특별해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리를 듣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 꿈은 '소리를 보고, 느끼고, 맛볼 수 있게 하겠다'로 변했죠. 그리고 지금 그는, 당신이 보셨다시피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사람이 되었죠."


그녀는 다른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미라의 노트도 있어요. 망고를 좋아했던 어린 소녀가 망고의 여왕이 된 이야기죠. 근데.. 잠시만요, 왜 '보라색' 망고인지 알려드릴까 찾아봤는데 그 페이지는 없네요? 이상하네?"


나는 아까 아미라가 나에게 비밀스럽게 전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아마도 아미라가 어떤 조치를 취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오늘 내가 만났던 모든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을 다시 스쳐갔다. 그리고 이곳에 정돈된 수많은 노트와 노트에 적힌 이름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럼 이 모든 노트들은...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들의 것인가요?" 내가 물었다. 아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아이들의 꿈 노트예요. 오늘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한때는 이곳의 아이들이었어요."


"그러면... 당신은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진열장 맨 안쪽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표지는 다른 노트들보다 더 복잡한 기호들로 가득했다.


"10살의 저는 세상의 모든 나라를 가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페이지를 넘겨 중간쯤을 보여주었다. 선명한 지도와 함께 그녀가 방문했던 나라의 이름이 보였다. 다음 장을 펼치자 그곳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진들이 펼쳐졌다. 그녀는 그중에 한 장을 집어 들어 나에게 보이며 말했다.


"여행을 다니며 만난 아이들이에요." 작은 오두막에 모여 앉아 책을 읽는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은 바다 건너 깊은 산속에 살고 있었어요. 산이 아닌 다른 풍경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찍었던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어요. 그때 제가 보았던 초롱초롱했던 눈망울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아마나는 사진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 아래로 작은 노트 한 권이 보였다.


"제가 떠나는 날, 아이들이 저에게 노트를 선물했어요. 낡은 노트였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빈 노트였죠. 제가 '왜 빈 노트를 주었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당신이 보게 될 새로운 풍경들로 이 노트를 채워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다음에 만날 때 함께 여행했던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라고 대답했어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정말로 여행할 때마다 이 노트에 모든 것을 기록했죠."


아마나가 다른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였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원형으로 둘러앉은 아이들이 서로의 눈을 반짝이며 노트를 읽어주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아이들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 너머 작은 오아시스 마을의 아이들이에요." 아마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은하수가 환히 드리운 어느 날 밤이었어요. 이 아이들과 모닥불에 둘러앉아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이건 무슨 별, 저건 무슨 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한 아이는 그중에서 제일 밝은 별을 가리키곤 저곳에 가보고 싶다고 얘기했죠. 저는 노트를 꺼내 아이에게 건네며, 저 별은 어떤 세상일지 그려보자고 제안했어요. 아이는 별빛을 따라 그리듯 자신만의 꿈 지도를 그려나갔죠. 밤하늘의 별자리처럼요."


아마나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다음 사진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강물 위에 지어진 작은 마을의 모습이었다.


"이곳은 큰 강이 흐르는 곳의 수상마을이에요. 여기 아이들은 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죠."


아마나는 사진 속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한 소녀를 가리켰다.


"이 마을에서는 습기 때문에 제 여행 노트가 늘 젖거나 눅눅해졌어요. 하루는 이 아이가 저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죠. 자기 집 천장의 방수 천을 잘라와서 노트 표지를 감싸준 거예요. '이제 노트 속의 이야기들이 안전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마나는 어딘지 익숙한 공간의 사진을 펼쳤다. 그곳에는 세 개의 선반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책장 하나가 보였다. 책장에는 몇 권의 노트만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작은 책장 하나에 제가 여행에서 가져온 노트들을 소중히 보관했어요."


그녀는 벽을 따라 늘어선 책장들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저는 그 이후로도 여행을 계속했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노트는 쌓여갔어요. 책장을 더 들였는데도 자리가 모자라기 시작했죠. 바닥에 쌓인 책더미들이 천장에 닿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문 앞에 멈춰서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 책더미를 바라보고 있더라구요. 들어와서 편하게 보라고 말을 건넷더니 그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서 들어왔어요."


아마나는 책장 사이를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아이는 노트를 하나씩 펼쳐보며 눈을 반짝였어요. 다른 세상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나 봐요. 물 위에 지은 집에 사는 아이들, 구름 위 산속에서 사는 아이들,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에서 사는 아이들... 이제껏 생각하지 못 한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였을 테니까요."


아마나의 눈이 추억에 젖은 듯 빛났다.


"다음 날, 그 아이가 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그 친구 역시 노트를 읽으며 무척이나 즐거워했죠. 책장 앞은 하루종일 아이들의 대화 소리로 가득했어요. 조용했던 저만의 공간에서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이 교류하는 곳으로 변하기 시작한 거죠.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어요. 모든 아이들이 이 공간에 올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아마나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을 응시했다.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필요한 것도 많아졌어요. 위층으로, 또 위층으로... 각 층마다 이곳에 머무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공간이 더 생겨났죠."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모든 층을 다 둘러보고 나서 계단을 뛰어내려왔어요. 두 볼이 상기된 채 숨을 헐떡이면서도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죠. 그 아이가 숨을 고르고 저에게 말했어요. '아마나! 여기 너무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게 다 있어요! 백화점 같아요!'"


아마나는 그 말을 하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이곳이 '꿈 백화점'이라고 불리게 된 것 말이에요."


나는 아마나의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아마나, 너무... 놀라워요. 정말 마법 같은 이야기예요."


그녀가 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있어요.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게 한 가장 소중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예요. 오늘 당신이 찾아오셔서 정말 기뻐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사실이 그녀를 통해 다시 상기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창틀에 놓인 작은 조개껍데기를 집어 들었다.


"이걸 귀에 대고 들어 보실래요?"


나는 조개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파도 소리만 들리는 듯했지만, 점점 또렷해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들리시나요?" 아마나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들려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나는 조개껍데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경청했다. 어른의 목소리, 어린 소녀의 목소리, 학교, 꿈, 세계여행, 그리고 따뜻한 격려의 말이 들려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와 아마나! 나는 놀라서 아마나에게 언젠가 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그럼 제가 이곳에 온 적이 있던 건가요?"


아마나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늘 이곳에 있었어요. 이곳 주위에 가득한 저 꽃들처럼요. 오늘은 처음으로 이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셨을 뿐이죠."


창밖으로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첫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램프가 하나둘 자동으로 켜지면서, 공간에 따뜻한 빛이 퍼졌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나가 창밖을 바라보다 부드럽게 말했다.


"별이 뜨기 시작하네요. 특별했던 오늘 하루가 끝나가고 있어요."


"아마나! 오늘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물었다. 아마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나에게 답했다.


"내일부터 우리에게 일어날 일은 곧 알게 될 거예요. 당신과 저,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내일이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곳에서의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니니까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별빛이 참 밝은 것 같아요. 특별했던 오늘을 기념하기 좋겠어요. 함께 나가볼까요?"


아마나의 발걸음을 따라 1층을 나와 건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밤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고, 꽃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대로 별빛이 환한 밤이었다. 아마나는 별빛을 받아 유난히 밝게 빛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아침에 이곳에서 내가 올라다보고 있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 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일순간 강해졌다. 간판의 글자들이 마치 물속에 잠긴 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꿈 백화점'이라는 글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그 자리에 다른 글씨가 떠올랐다. 전체를 명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단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학교'라는 글자였다. 바람은 더 세차게 불어왔고 별빛은 더 강렬해졌다. 그 사이, 간판은 그 모습을 완전히 바꾸었다. 건물의 외관도 화려한 모습에서 소박한 건물로 변해갔다.


"아마나! 모든 게 달라지는 것 같아요..." 나는 당혹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모든 걸 잃어버릴 것 같은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의 '아이'들과 더 함께 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내 옆에 서있던 아마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바람과 별빛이 너무 세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뻗은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단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짧게 들려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저 꽃들처럼."


그렇게, 꿈 백화점의 하루가 끝이 났다.





Epilogue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은 멎었지만 눈이 부셔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기분 좋은 온기가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 햇살의 느낌이었다. 눈을 서서히 떴을 때,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학교라고 쓰인 작은 건물 앞에 서 있는 나였다. 그리고는 바닷소리에 섞인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리자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서 유난히 키 작은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동차 장난감을 들고 시동 거는 흉내를 내는 아이도 있었다. 저 멀리 요리책을 들고 걸어오는 키 큰 소년과 그 옆에서 망고향 젤리를 꺼내 먹는 소녀가 있었다. 그 망고 소녀는 젤리를 또 하나 꺼내서 셔츠를 첫 단추를 잘 못 끼워 입은 어떤 소년의 입에도 하나 넣어 주었다.


학교 주변에 핀 꽃들도 눈에 들어왔다. 황금빛 쟈스민, 진홍빛 히비스커스, 새하얀 연꽃까지. 선명하게 빛나는 꽃들이 바람을 맞아 아이들 주위에서 살랑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시선을 내려 보니 내 허리춤 정도 되는 아이가 서 있었다. 갈색 눈동자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자기 몸보다 커 보이는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활기가 가득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듯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머금고 그 이름을 불렀다.


"안녕, 아마나."


아이는 너무나 익숙한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그 아이, 아마나가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내일 수업 시간에 제 꿈에 대해 발표하기로 했어요."


아마나는 아주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나에게 외쳤다.


"저는 세계 여행을 할 거예요!"


아마나는 책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세계 지도가 구불구불 그려져 있었고, 페이지마다 가보고 싶은 나라들에 작은 조개껍데기로 표시해 둔 노트였다.


"언젠가 세계의 모든 나라를 가 볼 거예요." 아마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모든 친구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거예요."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럴 거야." 내가 말했다.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나에게도 들려줄래?"


"네! 제일 먼저 들려드릴게요." 아마나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아마나의 손을 잡고 작은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향긋한 꽃향기가 더 진하게 풍겨왔다. 아마나,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내일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키 작은 거인, 이자스







꼬마 툭툭 운전사, 다르니카







과묵하지만 따뜻한 마음, 아드난







망고 & BTS 러버, 아미라







셰프의 꿈을 그리는 학교의 맏형, 파우신







미술시간이 제일 좋은 똑똑이 소녀, 합사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개구쟁이, 카잔







파일럿이 되어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아이, 아마나 (오른쪽 아래)



지금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의 아이들을 향한 여러분의 더 큰 관심과 응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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