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단풍의 노래(1)

갓바위와 소원

by 약천

먼 밤길을 달려 대구로 내려갔다. 고속버스는 강릉에서 청량리를 향해 밤새 달리던 비둘기호의 그 막막하고 처량했던 대책 없는 낭만조차 없다. 동대구역 옆 베이스캠프 L모텔에서 친구들을 만나 잠시 눈을 붙였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부근 동대구역 지하도 정류장은 갓바위나 파계사로 가는 버스가 거쳐가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서 부산을 떠는 친구들과 컵라면 등으로 간소하게 아침을 대신했다. 정류장에는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서너 명 눈에 띈다. 정류장에서 5:40경 도착한 401번 첫 버스를 타고 갓바위로 출발했다. 아직 물러나지 않은 어둠 속을 달리다 서다 반복하며 승객을 하나둘 태우는 버스는 금세 빈 좌석 없이 만원이다.


승객 대부분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고 평소처럼 첫 버스를 타는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얘기꽃을 피운다. 이른 새벽 일터로 나가는 걸까? 어르신들이 주말 새벽을 여는 것은 어디든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는 '인연과 그리움'의 행로를 묻는다.
"살면서 듣게 될까/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꽃이 지는 이유를~"

버스는 동구청, 금호교 위를 지나는 아양교, 대구공항, 불로동, 공산동, 능성동 등을 차례로 거쳐 40여분 만에 종점인 갓바위 정류장에 닿았다. 일출 전 산기슭의 미명은 아직 어둠이 물러나지 않았다. 일찍이 문을 연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인자한 얼굴이 가게 안 한쪽 벽에 붙은 갓바위 부처님 사진과 닮았다.

갓바위로 오르는 길 좌측으로 천막 가게들이 꼼꼼히 여며진 채 길게 줄지어 섰고 길 위엔 붉은빛 낙엽이 뒹군다. 등산로 초입 좌측에 부도 군이 늘어선 보은사를 스쳐 지났다. 노부부가 작은 트럭에 싣고 온 감을 내려서 아스팔트 길 한편에 첫 노점을 펴고 있다. 노부부의 사투리는 낯익고 큼지막한 감은 그 맛이 달콤하지 싶다.

두 능선이 합쳐져 좁아지는 곳 우측 관암사와 삼성각을 연결하는 아치형 돌다리가 팔공산으로 들어서는 산문 인양 성문처럼 지키고 서있다.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 약사전 범종각 등이 경사진 좁은 산비탈과 원래부터 일체였던 듯 군더더기 없이 조화롭다.


관암사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첫차로 도착했으니 제일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여지없이 깨졌다. 갓바위 쪽으로 난 긴 돌계단을 따라 오르는 산객과 참배객들이 적지 않다. 우리 일행에 비해 사람들의 배낭은 작고 단출하다.

산행이 주목적인 우리 일행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배객들로 보인다. 예전에 듣기로 갓바위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고 한다. 그 앞에서 나는 무슨 소원을 풀어놓아야 할까, 내게 제일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던가?

갓바위까지 1,365개라는 계단을 힘겹게 반쯤 올랐을까,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아주머니 한 분이 인사말을 건네며 계단을 내려와서 쏜살같이 스쳐 내려간다. 어느새 갓바위 부처님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내려오나 보다.

계단길 중간쯤 너른 공터에서 젊은이들이 쪽발로 서서 다른 발을 한 손으로 잡고 빈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그 옆에서 따라 해 보지만 뻣뻣한 몸이 생소한 동작에 의아해한다. 몸은 굳어져도 생각만은 늘 유연했으면 좋겠다.


어떤 소원을 꺼내 놓아야 하나? 수많은 돌계단을 오르는 그 길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찾도록 허락된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자대비한 부처나 중생제도의 원대한 꿈을 품은 불제자가 아닌 범부가 바라는 소원이야 건강 승진 합격 사업 성공 등 앞에 닥친 고난을 피하고 결핍을 채우는 일임은 보지 않아도 뻔할 터이다.

기실 소원은 욕심에 뿌리를 둔 욕망이라는 나무에 달린 과실이라 자르고 잘라도 다시 자라는 머리카락처럼 걷잡을 수 없이 주렁주렁 영글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수많은 불만과 욕망 중에 굳이 하나만을 꺼내 놓을 필요가 있을까,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미움 자책 욕심을 모두 다 꺼내놓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두의 답은 신새벽 높은 계단길을 힘겹게 올라 갓바위 앞에 서는 것은 마음을 괴롭히는 욕망의 보따리를 풀어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가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욕망의 불씨들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봄날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자신을 온전히 태워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머리 위 돌문처럼 생긴 능선 옆으로 난 계단 끝에 하늘이 트인다. 공양물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 앞을 지나 가슴 높이 계단 위 갓바위 부처님 앞 너른 마당으로 올라섰다.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연신 무릎을 꿇고 머리와 팔이 바닥에 닿도록 온몸으로 절을 올리고 있다.

팔공산 동쪽 관봉의 암벽을 뒤로하고 크고 당당한 몸체 풍만한 얼굴에 갓을 쓴 듯 평평한 바윗돌을 머리에 인 갓바위 불상이 앉아있다.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 좌상'이라 한다.

갓 떠올라 비치는 아침 햇살이 비 온 후 일시에 자라난 죽순처럼 검은 실루엣을 드리운 사람들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마당 가장자리 너머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산줄기들은 겹겹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 같고 하늘과 구름은 태양과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비로봉 거쳐 파계사까지 산길이 곱게 단풍을 물들이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19-10 L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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